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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암[菩提庵 ], 남해보리암에서 바다가 전하는 봄소식을 듣다 본문
보리암[菩提庵 ],
남해 보리암에서 바다가 전하는 봄소식을 듣다
♣보리암[]
경상남도 남해군 상주면 상주리 2065
상주면 보리암로 665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雙磎寺)의 말사이다
☎ 055-862-6115
♣ 찾아가는길
남해고속도로(진주ic)→남해 진교ic 출구→ 남해대교
→ → 남해 보리암
♣ 사찰기행일 : 2016.03.06(일)
♣ 보리암 개요: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雙磎寺)의 말사이다.
683년(신문왕 3)에 원효(元曉)가 이곳에 초당을 짓고 수도하면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뒤 산 이름을 보광산(普光山)이라 하고
초암의 이름을 보광사(普光寺)라 하였다.
그 뒤 이성계(李成桂)가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하고 조선왕조를 연 것을 감사하는 뜻에서 금산이라 하였고
1660년(현종 1)에는 현종이 이 절을 왕실의 원당(願堂)으로 삼고 보리암이라 개액(改額)하였다.
그 뒤 1901년에 낙서(樂西)와 신욱(信昱)이 중수하였고, 1954년에 동파(東波)가 중수하였으며
1969년에는 주지 양소황(梁素滉)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보광전(普光殿)을 비롯하여 간성각(看星閣)·산신각·범종각·요사채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큰 대나무 조각을 배경으로 좌정하고 있는 향나무 관세음보살상이 있다.
이 관세음보살상은 왼쪽에는 남순동자(南旬童子), 오른쪽에는 해상용왕을 거느리고 있는데
김수로왕의 부인인 허씨가 인도에서 모셔왔다고 하나 신빙성이 없다.
삼층석탑은 신라석탑의 양식을 보이고 있어 신라석탑이라 부르고 있으나,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감정되고 있다.
보리암 앞 바위 끝에 세운 높이 165㎝의 이 탑은 상륜부에 보주(寶珠)만 놓여 있다.
이 밖에도 보리암 주위에는 원효가 좌선하였다는 좌선대를 비롯하여 쌍홍문(雙虹門) 등 38경의 경승지가 있다.
사찰기행시작→→→
2016년3월6일 일요일
바다내음 봄길따라 남해로 향했다
남해는 1997년부터 2년동안 근무지 이기도 하다
봄의 좋은 기운을 얻고자 남해 보리암로...
남해섬은
제주도, 거제도, 진도에 이어 네 번째로 큰 섬이다.
예로부터 '동국여지승람'에도 적혀있듯 경상남도 남해의 경치는 빼어나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남해군은 산세가 뚜렷하고 기운차며 바닷물이 맑고 따뜻하다'라고 하였다.
한때 유배의 땅이었던 이곳으로 귀양살이를 온 많은 유배객들이 이곳의 아름다움을 노래와 가사로 읊었다.
김만중의 구운몽이나 사씨남정기 등이 모두 이곳에서 태어났다.
↗ 해무가 가득한 남해바다
어제 내내 봄비가 내린탓인지
남해바다는 해무로 가득...운치가 더 있어 보인다.
↗제1주차장에 있는 약수터
↗제1주차장에 대기중인 마을버스
제1주차장 요금은 성수기 5000원 비수기 4000원이다
비수기 인지 4000원 요금을 내고 주차후
제1주차장에서 제2주차장 거리는 약3km로서
마을버스를 이용해야 한다
물론 주차요금을 더 지불하면 제2주차장 까지 갈수 있고
마을버스 요금은 왕복2000원이다
↘마을버스를 타고 보리암 제2주차장으로→→
↗제2주차장 매표소이다
여기서도 보리암 문화재관람료 1000원 요금을 지불해야 한다
불교신자증있어 무료로 갈수 있었다.
↘ 여기서 보리암까지는 약800m 거리
일요일이라 그런지 금산 탐방객들로 북적 거렸다...!
↗보리암 입구에서 바라본 금산 풍경
금산(錦山)은 소금강산이라 할 만큼 경치가 빼어난 명산이다.
옛 이름은 신라 때 원효가 이 산에 보광사라는 절을 지었기 때문에 보광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러다가 오늘날의 금산이라 부르게 됨은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의 이야기가 얽혀있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에 따르면 이성계가 임금이 되기 전
이 산에 들어와 임금이 되게 해달라고 산신에게 기도를 하며 임금이 되면 이 산 전체를 비단으로 휘감겠다고 약속했다 한다.
그러나 임금이 되고 난 후 산 전체를 감을 비단을 못 구해 고민하던 중
한 슬기로운 승려가 좋은 묘안을 내놓은 것이 '비단 금(錦)'자를 써서 금산이라는 이름으로 이 산을 '둘러'주었던 것이다.
남해바다를 내려다보는 금산은 예로부터 38경을 자랑하였다.
그 38경은 일출의 장관인 정상바위 망대, 주세붕이 쓴 문장대, 전망이 가장 좋은 보리암,
이태조가 백일기도하던 기단 등의 37경에 일출이 장관이라 해서 이름 붙여진 일출경 등 모두 38경이 있다.
↗보광전[普光殿]
↗간성각
현재 보리암 종무소
남해 보리암에는 다른 사찰에서 볼 수 없는 전각 하나가 있다.
현재 종무소로 쓰고 있는 간성각(看星閣)이 그것이다.
옛날에는 노인들이 수명장수를 위해 남극성(南極星)을 보는 간성(看星) 풍습이 있었다.
이 간성각은 바로 그 옛 간성 풍속의 유산이다.
일명 ‘노인성(老人星)’이라 불리는 남극성은
아르고(Argo) 별자리에서 광도가 가장 높은 카노푸스(Canopus) 별이다.
이 별은 남쪽이 확 트인 전망 좋은 고산에서 잘 보이는데,
특히 춘분 저녁이나 추분 새벽에 잘 보인다고 한다.
노인성은 보는 시기가 정해져 있었다.
도교에서는 춘분 저녁과 추분 새벽에 남쪽에서 그 출현을 기다려 제사를 지냈다.
이 별이 보이면 나라가 편안해지고 임금이 수명이 연장되지만,
보이지 않으면 전란이 일어난다고 예측했다.
새해 첫날에 동해안에 일출을 보러가는 것이
요즘 풍습이지만, 조선시대에는 동지 무렵에 남쪽으로
내려가서 노인성을 보는 풍습이 있었다.
↗종무소 옆 약수
산행객 및 참배객들이 목을 축이고 있다
↘범종각
↗범종각 옆에 있는 평화의 불 기념비
↗예성당[설법전]
↗보리암 삼층석탑과 해수관음상
☞보리암전삼층석탑(菩提庵前三層石塔) 시도유형문화재 제74호 (남해군)
보리암이라는 암자와 가까운 남해금산 꼭대기에 자리하고 있어,
‘보리암전삼층석탑’이라 불리고 있는 3층 석탑으로, 주변의 경치가 너무나 빼어나 더욱 유명해졌다.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으로 이루어진 탑신(塔身)을 놓고 머리장식을 얹은 일반적인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2개씩의 안상(眼象)을 얕게 조각하였다. 위층 기단은 아래층에 비해 폭이 크게 줄었다.
탑신의 몸돌 각 면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가지런히 새겼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3단씩이고, 처마는 직선을 유지하다 네 귀퉁이로 갈수록 두툼해지면서 위로 솟았다.
꼭대기에는 보주(寶珠:구슬모양의 장식)만 남아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허태후(김수로의 왕비)가 인도에서 가져온 사리를 원효대사가 이곳에 모셔 두었다 하나,
두꺼운 지붕돌 과 3단의 지붕돌받침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탑으로 추정된다.
※전문설명
불사리(佛舍利)를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이곳에 모셔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이 석탑은 화강암(花崗岩)으로 건조한 고려(高麗) 초기(初期)의 양식을 보이고 있어,
단층(單層) 기단(基壇) 위에 형성한 높이 165cm의 우아한 탑신(塔身)에는 각층마다 우주(隅柱)가 새겨져 있고,
상륜부(相輪部)에는 귀한 구슬 모양의 보주(寶珠)가 남아 있다.
이 탑은 신선한 남해금산(南海錦山)의 영봉의 선경(仙境)에 위치하고 있음이 그 자랑이다.
↗산신각
↗극락전[만불전]
↗ 극락전 옆 암벽에 있는 봄소리....
겨울 내내 얼었던 것이 따스한 해풍을 맞으며
졸졸 봄소리를 전한다........!
↗극락전에서 바라본 설법전[예성당]
↘선은전
태조 이성계가 조선건국을 위하여 기도하던곳
璿恩殿(선은전)은 태조 이성계가 여기서 100일 기도를 하였고,
그 뒤 조선을 건국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오며
그 보답으로 이 전각을 지었다고 한다.
璿恩의 선은 구슬이라는 뜻인데 구슬 옥(玉)을 뺀 글자(睿)는 뛰어나다는 뜻이 들어 있다.
그러므로 특별한 은혜, 빼어난 은혜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될것 같다.
↗선은전 가는길....
↑남해금산 영흥기적비
↑ 대한중흥공덕축성비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신앙의 대상으로 하는 불교신앙
이성계는 왕이 되기 전에 큰 뜻을 품고 팔도의 명승지를 다니면서 기도를 올렸는데,
남해의 보광사에서 백일관음기도를 드린 뒤 꿈에 관세음보살로부터 금척(金尺)을 하사받았다.
등극한 뒤 태조는 불은(佛恩)에 감사하는 뜻에서 보광산을 금색 비단으로 둘러싸려 하였으나,
비단의 양이 엄청나고 오래지 않아서 썩게 된다는 신하의 말에 따라 산 이름을 금산(錦山)으로 바꾸어서 천만 년이 지나도 변함이 없는 비단산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1660년에는 이 절을 왕실의 원당(願堂)으로 삼고 보리암으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이곳에서 관음기도를 지성으로 하면 반드시 올바른 깨달음인 보리를 성취할 수 있다는 데서 기인되었다.
이 보리암에도 수많은 영험담이 전래되고 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을 도와서 대승을 거두게 했던 삼련(三蓮) 비구니에 얽힌 설화이다.
삼련은 묘련(妙蓮)·보련(寶蓮)·법련(法蓮) 등 세 비구니의 이름이다.
전라도 광양에 살았던 황유초(黃維肖)에게는 선옥(仙玉)이라는 딸이 있었다.
그녀는 출가하여 보련이 되었고, 선옥의 유모는 묘련, 선옥의 몸종은 법련이 되었으며, 그들의 스승은 지월(指月)이었다.
어느 날 이들은 ‘대도(大道)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관세음보살의 신력(神力)과 가피를 입지 않으면 안되리라.’고 생각하여 남해 보리암을 찾았다.
그곳에서 1,000일을 관음기도를 하다가 어느 날 불상좌대 밑에 있는 고문서를 발견하였다. 그 문서에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우리 세 사람은 연화도인(蓮花道人)을 모시고 십년간을 이곳에서 관음성호(觀音聖號)를 부르며 공부하여,
마침내 관음대성의 자비롭고 미묘한 성상(聖相)을 친견하였다. 기쁨과 감격에 넘치어 세세생생 이곳에 와서 연화도인을 모시고 공부하기를 맹세하였다.
정덕 무인구월(正德戊寅九月) 연화도인 지월의 제자 성운(性雲)·성련(性蓮)·성월(性月)·근기(謹記)”.
이 글에 적힌 연화도인은 현세의 은사 지월이고, 성운은 묘련, 성련은 보련, 성월은 법련으로 화현한 것이다.
세 비구니는 더욱 신심을 굳혀서 정진하고 천일의 정진을 회향하여 자재한 신통력을 얻게 되었다.
그 뒤 그들은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손자병법을 익히고 해산열도(海山列島)의 지세와 해류를 살피는 한편,
거북선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뚜껑을 씌운 배를 만들어 타고 이순신과 함께 군사전략을 숙의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보련은 이순신의 막하에서 참모 겸 지휘자의 구실을 하여 싸움마다 대승을 올리게 하였고,
다른 두 비구니는 뚜껑 배를 타고 왜적을 섬멸하였다. 뒤에 조정에서는 보련에게 자운선의장군(紫雲宣義將軍)이라는 직함을 내렸다고 한다.
또, 조선 중기의 이창해(李蒼海)는 제주목사의 부임을 위해서 배를 타고 가던 도중에 태풍을 만나서 일본의 지마도(志摩島)에 이르러 40여 년을 살았는데,
어머니와 동생의 관음기도 덕분에 풍랑을 타고 고국으로 돌아와서 동생과 해후하게 되었다는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그가 제주도로 떠나던 날 어머니는 낙산사 관음상 앞에서 관음의 대비주(大悲呪)를 외우며 기도하였고,
매년 풍랑을 만났던 날이면 명복을 기리면서 관음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조선 말기에 김포에는 판서 벼슬에까지 올랐던 심씨가 살고 있었다.
나이 육순이 넘도록 자식도 없이 살다가 아내까지 사별하게 되자 그 고적함을 달랠 길이 없었다.
그는 보문사로 가서 지성을 다하여 관음기도를 올리면서 아내를 맞게 하고 아들을 점지하여 줄 것을 축원하였다.
심판서가 회향하던 날 꿈에 관음보살이 나타나서 배필이 될 여자를 만나게 해주었고, 이들은 아들을 낳아서 단란하게 살다가 해로하였다고 한다.
이 밖에도 조선시대의 수많은 고승들은 관음기도를 즐겨 행하였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이러한 경향은 더욱 두드러지는데, 특히 천수대비주를 통한 기도가 널리 성행하였다.
관세음보살을 통불교적으로 신앙하고 있는 우리 나라에는 3대관음성지인 낙산사·보리암·보문사 외에도 숱한 관음영험도량이 산재되어 있다.
특히, 금강산에 자리잡은 보덕굴(普德窟)과 설악산의 오세암(五歲庵),
충청남도 논산의 관촉사(灌燭寺), 성덕산 관음사 등은 모두 특이한 이적을 보였던 관음성지이다.
또한, 서울 근교에도 예로부터 관음의 영험도량이 있었다. 동쪽에는 창신동의 안양암(安養庵), 서쪽에는 옥천암(玉泉庵) 해수관음이 있으며,
남쪽에는 관악산 삼막사(三幕寺)가 있다. 이 세 곳은 오늘날에도 기도참배객들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이들 관음도량을 비롯하여 우리 나라의 명산대천에는 수많은 관음연기와 함께 많은 관음영험담이 전해지고 있다.
금강산보덕굴은 우리 나라 관음신앙의 홍포(弘布)에 크게 영향을 미쳤던 영험처로서 관음의 화신인 보덕각시가 출현하였던 곳이고,
고구려의 화상 보덕(普德)이 관음의 진신을 친견한 도량이며,
고려 의종 때의 고승인 회정이 천수주력(千手呪力)으로 기도하여 관음의 원통삼매를 성취한 영지이기도 하다.
설악산의 오세암은 조선 초기에 관세음보살을 어머니로 생각하는 다섯 살 어린아이가 겨우내 혼자서 암자에 머물러 있었지만,
관음이 어머니처럼 보살펴주어서 무사히 생명을 건졌을 뿐 아니라 도통하게 되었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용문산 상원사(上院寺)는 세조에게 백의관음의 모습을 나타내어 세조로 하여금 선정을 베풀도록 회개시킨 곳이며,
은진미륵의 관음상에서는 나라에 어려움이 닥쳤을 때 온몸에서 땀이 흐른다고 한다.
현재 우리 나라의 주요 사찰은 대부분 원통전 또는 관음전이라는 전각을 별도로 건립하고,
그 속에 관음보살을 봉안하고 있다. 보통 관세음보살상은 왼손에 봉오리 상태의 연꽃을 들고 오른손에 감로병을 들고 있다.
왼손에 든 연꽃은 중생이 본래 갖춘 불성(佛性)을 상징한다. 그 꽃이 활짝 핀 것은 불성이 드러나서 성불(成佛)하였다는 것을 뜻하나,
현재의 꽃봉오리는 불성이 번뇌에 물들지 않고 장차 필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또 감로병에는 감로수가 들어 있는데, 이 감로수는 불사(不死)를 뜻한다.
영원히 죽음이 없는 불사의 물로써 중생의 열뇌(熱惱)를 깨끗이 씻어주고 사악한 기운을 서기(瑞氣)로 바꾼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또, 관음의 머리에 쓴 보관(寶冠)에는 부처님의 모습이 새겨져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 부처는 아미타불이다.
관음은 아미타불을 본사(本師)로 삼고 항상 모신다고 하였으므로 이를 조형화하여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원통전의 후불탱화로서 주로 아미타삼존탱화를 모시게 되는 것도 여기에서 연유한 것이다.
보리암[菩提庵 ],
남해 보리암에서 바다가 전하는 봄소식을 듣다
※인용글 : 자료 인터넷사전 및 쌍계사, 남해군청 홈페이지 전통사찰관광정보홈페이지자료등 참고함.
바다늑대Forever[2016.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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