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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취암,천년향기.. 꼬리 아홉달린 여우의 전설에 젖다...!

바다늑대FORCE 2012. 6. 12. 15:11

 

정취암,천년향기.. 꼬리 아홉달린 여우의 전설에 젖다...!

 

2012년6월12일

의상대사께서 창건 하셨다는 정취암을 향했다

진주에서40km달려 꼬불 꼬불 산길...

초여름 태양이 너무 뜨겁다....!

 

정취암(淨趣庵)은

산청군 신등면 양전리 78번지 대성산(大聖山)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 해인사의 말사다.

 

찾아오는길은 아래와 같다.

* 서울-> 중부고속도로, 경부고속도로 -> 대전 -> 판암, 진주 JC : 진주방향 -> 산청 IC
* 서해안 고속도로 -> 광주-> 88고속도로 -> 함양 JC -> 산청 IC
-> 전주-> 남원 -> 88고속도로 -> 함양 JC -> 산청IC
* 대구, 광주 -> 88고속도로 -> 함양 JC -> 산청 IC
* 부산, 순천 -> 남해 고속도로 -> 진주 JC -> 산청 IC
* 강원도->중앙고속도로->대구 -> 88고속도로 -> 함양 JC -> 산청 IC
->구마고속도로->남해고속도로->의령 IC
* 의령, 합천 -> 삼가 -> 가회 -> 단계 -> 정취암 입구

 

홍화원에서

둔철산 2차선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정취암 표지석이 나온다

 

 

 

표지석에서 5분정도 가면

주차장이 나오는데 안전하게 주차를 하고

걸어서 정취암으로 내려가다 보면 입구에 공양비천상과 망부석이 있고 바위틈새 약수물이 흘러나오고 있다

 

 

 

창건설화

정취암은 산청군 소재지에서 동남 방향 약 10km에 위치한 대성산(일명:둔철산)의 기암절벽 사이에 자리한 사찰로 그 상서로운 기운이 가히 금강에 버금한다 하여

옛부터 소금강이라 일컬었다

신라 신문왕 6년(병술, 서기 686년)에 동해에서 장육금신(부처님)이 솟아올라 두 줄기 서광을 발하니 한줄기는 금강산을 비추고, 또 한줄기는 대성산을 비추었다.
이때 의상조사께서 두 줄기 서광을 쫓아 금강산에는 원통암을 세우고 대성산에는 정취사를 창건하였다.
정취암에서 북쪽으로 약 4km에 위치한 율곡사는 원효스님께서 창건하셨는데, 정취사와 율곡사에 각기 주석하고 계시던 의상 스님과 원효스님께서는 수시로 왕래하며

수행력을 서로 점검하고 탁마 수행한 일화들이 전해지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조선 중기의 기록에는 정취사로 사명이 기록되어 있는데, 조선후기에서 구한말 사이에 조성된 불화에는 정취암으로 기록되어 있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취암정취관음보살을 본존불로 봉안하고 있는 한국유일의 사찰이다.
신라 헌강왕 2년(무인, 858년) 굴산 범일선사가 낙산사에 봉안했던 정취보살상을 고려 고종 41년(갑인, 1254년)에 명주성이 몽고병에 함락될 때

 야별초 10인과 사노인 걸승이 땅속에 묻어 난을 무사히 피하게 되었다.
그 후 기림사 주지스님 각유선사가 이 정취보살상은 국가의 신보이니 어부(궁궐)에 모실 것을 왕에게 아뢰어 왕의 명을 받아 어 부에 모시게 되었다.

고려 공민왕 3년(갑오, 1354년)에 화경, 경신 두 거사가 정취사를 중건한 후 어부에 봉안되어 있던 정취보살상을 정취사로 이운하여 봉안하게 되었다.

정취사는 고려 공민왕의 개혁 의지를 실현하고 원나라와 이후의 명나라로부터 관섭을 극복하려는 개혁 세력의 주요한 거점이 되었는데,

산청군에 전해지는 문가학과 정취암에 얽힌 설화는 당시 보수 세력과 개혁 세력간의 갈등을 설화로 각색 것으로 사료된다.

정취암은 창건 이래 고승납자들의 요결처가 되었으며, 조계종 종정을 역임하신 고암 대종사와 성철 대종사께서도 한때 주석하시며 정진 하셨다.

또한 수많은 선남선녀들이 정취관음보살의 가피력으로 보리대원을 성취하여 최고의 관음성지로 그 명성이 널리 전하여 졌다.

그러나 무상살귀를 그 무엇인들 거스릴 수 있으리요. 조선 효종 3년 임신 4월 26일(서기 1652년) 화마가 진동하여 원통보전을 비롯한 모든 전각이 전소하였으며

 이때 정취보살상도 함께 소실되어 창건 이래 가장 큰 비운을 맞았다.
당시 정취암에서 정진하던 봉성당 치헌선사께서 효종 4년(계사, 서기 1653년)에서 9년(무술, 서기 1658년) 사이에 화주를 구하고 사재를 내어 중건하였는데

 현재의 목조관음보살좌상(정취관음보살상)은 효종 5년(갑오, 1654년)에 소실된 정취보살 상을 재현하여 조성하였다고 전한다

봉성당 치헌선사는 정취암의 중창조로 이후 평생을 정취암에 주석하시면서 큰 법력으로 중생들을 안위케 하였는데 지금까지도 그 가피의 명성이 전하여 지고 있다.

 선사의 생몰연대는 전하여지지 않으나 입적하신 기일은 음력 12월 20일로 기록되어 있어 이날을 개산일로 정하여 개산제를 봉행하고 있다

 

원통보전- 圓通寶殿
관세음보살을 봉안하는 전각의 이름.

다른 이름으로는 원통전, 관음전, 보타전 등으로도 명명하는 것으로서 모두가 관세음보살을 봉안한 전각을 지칭한 다른 이름이다.
원통보전이란 이름은 관세음보살이 세수천안(눈이 천개 손이 천개)으로서 원통삼매에 들어 일체 모든 중생들의

소리와 모습을 동시에 모두 듣고 보아 구원하므로 관세음보살의 묘용을 지칭하여 붙인 이름이다.
정취암 원통보전에는 주불로 정취관세음보살상이 봉안되어 있고, 후불탱화로는 정취관음탱화,

편에 신중탱화, 서편에 지장보살상지장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산청 정취암 목조관음보살 좌상 (山靑 淨趣庵 木造觀音普薩 坐像)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 314호
경상남도 산청군 신등면 양전리

정취암 원통보전에 모셔져 있는 관음보살좌상이다. 정취암은 의상조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관음성지로 유명하다.
이 불상은 불신(佛身)과 엎어놓은 연꽃무늬가 새겨진 낮은 대좌가 하나의 목재로 조성되었다.

 자세는 등을 세우고 머리부분을 약간 앞으로 내민 모습의 가부좌를 하고 있다.
머리에는 보관을 쓰고 있는데, 보관은 중앙에 큰 화불(化佛)과 앞뒤로 불꽃무늬 장식이 달려 있으나, 후대에 따로 만들어 부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얼굴은 네모 반듯하며 턱이 둥근 형태이고 가늘고 긴 눈, 완만한 콧등, 입술 양끝에 양감을 주어 미소를 머금은 모습등이 부드러운 인상을 준다.

 짧은 목에는 세 개의 주름인 삼도(三道)를 얕게 표현하였다.

옷주름선은 대체적으로 간략한데, 반가부좌하여 드러난 오른발 밑으로 보이는 군의자락을 종아리와 평행하게 드리운 것이 특징적이다

규모는 50cm 정도의 크기로 안정감이 있고 단아한 인상을 주는 작품으로, 조선후기에 제작된 작품으로 추정된다.

 

정취보살님

원통보전 뒷편 응진전 옆 바위 절벽 사이에 봉안된 석조 정취보살상은 신라불상을 재현하여 조성하였으며, 2004년 8월에 이곳에 봉안하였다.

정취보살님은 관세음보살의 화현이라고도 하나 화엄경입법계품에 선재동자가 구법수행하는 53선지식 중에 한분으로 중생들의

 고통과 원하는바를 널리살펴 고통으로부터 빨리 벗어나 해탈에 이르게하는?[보문 속질행해탈]의원을 성취하신 보살님이다.

처음 정취암에 정취보살을 모시게된?것은 고려 공민왕3년에 화경거사와 경신거사가 정취암을 중수한 후 왕실에 모셔져있던

 정취보살상을 이곳에 모시게된 것에서 연유한다.

 

 

응진전- 應眞殿
아라한을 봉안하는 전각의 이름.

다른 이름으로는 라한전(500라한, 16라한)이나 간혹 영산전 등으로 명명하는데, 가운데 주불은 석가모니불을 봉안하고

 좌우에 16분 혹은 500분의 아라한과를 증득한 부처님의 제자들을 차례로 배열하여 봉안한다.
응진이란 인간과 천상의 공양을 능히 받을 수 있는진리를 깨달은 이를 말한다.
응은 능응의 지(智)요, 진은 곧 소응의 이(理)이니 지로써 이에 응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응진이라 한다.
정취암 응진전에는 주불로 석가모니불을 봉안하였고,

 28대 조사인 달마대사상16아라한상을봉안하고 있으며 라한탱화를 봉안하고 있다.

 

삼성각 三聖閣
삼성각은 칠성(七星)과 산신(山神)과 독성(獨聖) 세 성인을 봉안하는 전각이다.

칠성(七星)은 북두칠성을 말한다. 원래 도교에서 섬기는 신앙의 대상이었다가 불교가 전래되면서 불교 안으로 습합되었다.

 도교에서 말하기를 칠성이 인간의 길흉화복을 맡았다하며 이것이 곧 칠성여래, 칠원성군이라 한다.

산신(山神)은 산을 수호한다는 신령. 산신으로 원래는 토속신앙이었으나 불교가 전래되면서 다른 토속 신앙들과 같이 불교에 습합되었다.
산신 신앙은우리 민족의 건국신화에도 나오는데, 환인(제석천왕:하늘의 신으로 천주의 별칭이며, 도리천의 임금이다.)의 아들 환웅이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세상을 다스리기를 원했다. 환인이 그 뜻을 알고 천부인을 주어 인간세상을 다스리게 했다.
환웅이 무리삼천을 거느리고 태백산(지금의 묘향산)에 내려와 인간세상을 다스리고 교화시켰다.

 이때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사람이 되기를 환웅에게 기원하여 쑥과 마늘을 주며 햇빛을 보지 않고 동굴 속에서 백일기도를 하게 하였는데,

 곰은 백일기도를 잘 마쳐서 여자 사람이 되었고호랑이는 기도를 마치지 못하여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곰이 변한 웅녀와 환인이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단군왕검이다.
즉 단군왕검은 우리 민족의 시조이며, 당고(요임금) 즉위 50년에 우리 민족 최초로 조선이라는 국호로 나라를 세웠다.
건국신화에 나오는 곰과 호랑이는 토속신앙 형태의 토템으로 곰을 숭배하는 종족과 호랑이를 숭배하던 종족을 상징하며,

 호랑이는 산신을 상징하는 동물로 우리민족은 숭배하여 왔다.

독성(獨聖)은 즉 나반존자로 천태산에서 혼자 도를 닦아 연각을 성취하였으므로 독성이라 일컫는다.
연각은 12연기의 이치를 관하여 번뇌를 끊고 진리의 깨달음을 증득하거나, 떨어지는 꽃잎과 낙엽 등의 경계를 보고 무상적멸의 이치를 깨달은 사람을 말한다

산청 정취암 산신 탱화 (山淸 淨趣庵 山神탱화)
-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 243호
- 경삼남도 산청군 신등면 양전리

이 그림은 1833년[순조33]에 제작된 것으로 가로, 세로가 각기 150cm 크기의 불화(佛畵)이다.
불화라고 하지만 산신이 호랑이를 타고 행차하는 것을 협시동자(挾侍童子)가 받들고 있는 형상을 묘사하고 있는

그림의 주제는 불교적이라기 보다 오히려 토속신앙을 표현한 것이다.
전통적인 토속신앙과 불교의 혼합을 잘 보여주는 그림이다.

 

세심대 석조 산신상

정취암 삼성각 뒤 기암절벽의 세심대에 봉안한 석조산신님은 참으로 기이한 인연으로 봉안 되었다.
정취암에는 오랜 세월동안 매년 음력 3월 10일 부터 산신하강일인 3월 16일 까지 7일기도를 전통적으로 하고 있다.

2008년 음력3월16일(2008년 4월21일)에 7일산신기도 회향날 조각을 한다는 처사님 한분이 찾아왔다.

사연인 즉 일년전(2007년 음3월 10일부터 16일 사이)꿈에 수차례 호랑이를 타고앉은 산신님이 나타나서 [대성산]으로 모시라는 선몽을 받았단다.

그래서 그곳이 어디인지도 모른체 꿈에 본 모습되로 수 개월 동안 화강석을 깍고 다듬어 산신상을 조각을 했는데, 완성된 조각상이 약 2,5톤(2,500kg)이나 된다.
산신상을 조각해놓고 대성산이 어디인가 하고 전국을 찾아다녔단다.

그러던 중에 7일 산신기도를 회향하는 음력3월16일에 우연히 정취암까지 와서보니 꿈에 선몽한 장소와 똑 같다면서 이곳이 산신님의 인연터인 것 같다며

 정취암에 모시기를 원했다.

그말을 듣고 보니 참으로 기이하여 정취암에 모시기로 하였으나,

당시에는 2,5톤이 넘는 석상을 삼성각 뒤편 절벽 세심대에 모실수 있는 입지조건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다.

 절에까지 운반해오는 것도 문제였으나 그 무게를 들어올릴 수 있는 50톤이상 대형크레인이 절에까지 들어올 수 없었고,

 대형헬리콥터를 이용하게 될 경우 건물지붕이 다날아간다며 그도 안된다 했다.

그래서 사찰 진입도를 절벽에 축을 쌓아 다시 개설하고, 가장 큰 포크레인으로 크레인을 앞뒤에서 끌어 당기며,우여곡절을 격으며,

 삼성각 뒤편 절벽의 세심대에 봉안하게 되었다.

정취암은 정취관세음보살을 본존불로 모신 유일의사찰이지만, 또한 자손이 귀한 많은 분들이 산신기도를 하여 자손을 본 영험한 도량이다.
이제 거룩한 산신님을 세심대에 모셨으니, 중생들의 모든 업을 맑히고 바라는 소원 다 성취하는 귀의처가될 것이다.
산신님 봉안 인연공덕으로 원성취하여지이다.

 

 

 원통보전(圓通寶殿)우측에 있는  대성산정취암 편액이 걸려있고

그 뒷편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면 꼬불꼬룩한 도로가 풍경소리와 함께 어우러진다....!

 

 

 

정취암 뒷편 비경이 너무 좋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꼬리 아홉달린 여우의 전설에 젖어 본다..!

♣정취암과 여우설화

옛날 고려시대 공민왕은 왕자시절 원나라에 불모로 붙잡혀갔었다. 나라를 빼앗긴 국치의 모진 수모를 뼛속 깊이 새기며 절치부심의 나날을 피눈물로 보내다 돌아와 후일 왕이 되었다. 왕이 된 공민왕은 지금의 간도 땅까지 영토를 확장하였으며, 국가의 자주권 회복과 왕실의 권위 회복을 위한 개혁의지를 실현하기 위하여 신돈스님을 등용한 후 수구 보수 세력들을 척결하려다 그들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결국 개혁의지가 좌절되었다.
그 후 국가 기강이 극도로 혼란해졌으며 이성계 등에 의하여 결국 고려는 멸망하고 조선 왕조가 건국되었다.
공민왕이 신돈스님을 등용한 후 국가의 자주권 회복과 수구 보수 세력들을 척결하려 할 무렵을 전후하는 시기에 정취암은 개혁파들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이러한 정황을 간접으로 시사하는 설화가 지금까지 널리 전해지고 있다.

고려 말기 어느 때에 정취암 바위굴에는 500년 묵은 여우가 살고 있었다.
이 여우는 매년 섣달그믐 밤이면 사람을 홀려서 한 명씩 죽였다. 그리하여 정취암에서는 매년 섣달그믐이 되면 스님을 비롯한 대중들이 절을 비우고 피신을 하게 되었다.
절에서 대중들이 섣달그믐마다 피신을 하자 그 피해가 인근 마을로 이어졌다.
이때에 정취암 10여리 밖 소이 마을에 문가학이라는 선비가 살았다. 문가학은 어려서부터 담력이 담대하고 문무를 겸비하여 그 재질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바위굴의 500년 묵은 여우의 폐해가 널리 펴지고 인근의 큰 우환거리로 전해지자 문가학은 그 여우를 손수 잡기로 하였다.

문가학은 섣달그믐날 술을 한말 짊어지고 정취암에 올라가 밤이 깊어지도록 기다려다.
간간히 스쳐지나는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소리만이 고즈넉한 산사의 밤을 지키는 듯 사위가 적막 그 자체였다.
이경이 지나고 삼경도 깊어갈 무렵 한 줄기 스산한 바람과 함께 나타난 여인이 문밖에서 서성거리며 문을 기웃거렸다.
문가학은 이것이 요괴이구나 마음으로 생각하고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담담한 표정으로 그대는 무슨 연유로 이 깊은 밤에 산사를 찾았느냐고 묻고 외간의 사람이기는 하지만 밖이 추우니 방으로 들어오게 한 후 자리에 앉으라 하였다.
방으로 들어와 불빛에 비친 용모를 보니 아찔할 정도로 미색이 빼어난 미인이었다.
문가학은 적적한 밤중에 이토록 빼어난 용모를 갖춘 귀인을 만났으니 어찌 술이 없을 수 있겠는가 마침 좋은 술이 있으니 같이 마시자고 하였다.
한담을 섞어가며 함께 술을 마시다 보니 밤은 깊어가고 술 또한 바닥이 드러나서 만취가 되었다.
여인이 술에 취하자 잠이 들어서 비스듬히 기대어 옆으로 눕는 것을 보니 꼬리가 아홉 달린 구미호의 화신이었다.
문가학은 미리 준비한 끈으로 여우의 손과 발을 묶었다. 여우가 깜짝 놀라서 깨어나더니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였다.
문가학은 꾸짖어 말하기를 요사스러운 짖을 해서 많은 작폐를 하였으니 그 죄가 죽어 마땅한지라 용서할 수 없다고 하였다.
여우가 애원하며 말하기를 나에게는 온갖 일을 마음대로 꾸밀 수 있는 둔갑술 비결이 있는데 살려주면 대신 그 책을 주겠다고 하였다.
문가학은 마음속으로 기뻐하였으나 여우에게 속을 보이지 아니하고 먼저 그 책을 보고난 후 사실과 다르지 않다면 살려주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여우가 굴로 들어가 둔갑술 비결이 적혀있는 책 한권을 들고 나와서 건네주었다.
문가학은 둔갑술 비결이 적혀있는 책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마지막 한 장이 남아 있을 때까지 독서 삼매에 빠져들어 보고 있었다. 그 때 여우가 끄나풀을 몰래 풀고 갑자기 책을 낚아 채어서 굴속으로 도망쳐 사라져 버렸다.

문가학은 지금까지 본 둔갑술 비결대로 둔갑술을 부려 몸을 바꾸어 보았다. 그런데 둔갑이 완전히 되지 못하고 옷고름은 감출 수 없었다.
그 후 문가학은 과거에 급제하여 내한 벼슬을 하면서 여우에게 배운 둔갑술로 새로 변하여 궁중에 들어가 은자(은으로 만든 돈)를 빼내어 거사 자금으로 쓰다가 발각되어 역모죄로 참수되었고 그 집터도 못이 되었다고 전한다.
그밖에 둔갑술로 은기둥을 만들게 하여 남쪽 하늘로 날아가는 것을 관병이 뒤쫓아 고향 마을을 찾아와서 가산을 적몰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 이야기는 당시 국가의 자주권을 회복하고 수구 보수 세력들을 척결하여 나라를 새롭게 개혁하려던 공민왕의 개혁의지에 뜻을 함께 하던 개혁파 세력들이 일으킨 거사와 관련된 이야기로 사료된다. 정취암에서 멀지 않는 청곡사에 신돈스님이 주석하였고, 공민왕 3년에 스님이 아닌 화경과 경신이라는 두 거사가 정취암을 중수한 것과 중수 후 왕실에 봉안되어 있던 정취보살상을 이곳 정취암에 옮겨와 봉안 한 것, 목화 씨앗을 중국에서 몰래 가져와 우리나라에서도 무명옷을 입을 수 있도록 한 삼우당 문익점 선생이 문가학과 같은 시기에 살고 같은 남평 문씨 일족이며, 또한 역모에 연루된 점등 많은 관련 증거들을 들 수 있다.

그렇다면 여우와 둔갑술은 무엇을 상징 할까? 여우는 거사를 위한 어떤 계획이거나 결사의 뜻으로 해석할 수 있고 둔갑술로 궁궐에 들어가서 거사 자금인 은자를 빼내왔다는 것은 왕실에서 거사 자금을 비밀리에 주었거나 내통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유추해 볼 수 있는 상징성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설화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하여 유추해볼 때 정취암은 당시 고려 말 국운이 쇠퇴하여 진나라를 새로 일으켜 세우려는 국가 개혁 의지에 대한 모종의 결집체였거나 거점이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전하는 설화이다.

 

석조공양비천상 시비(石造供養飛天像 詩碑)/수완스님

뒷면에 있는글

 

절암현정취(絶巖懸淨趣)

산천일망통(山川一望通)

만학백운기(萬壑白雲起)

구문담진적(扣門淡塵跡)


기암절벽에 매달린 정취암은

산천이 한눈에 다 들어오고

골짜기 흰 구름 피어오르는 곳

문을 두드리면 세상에서 찌든 마음 밝게 씻긴다

 

 

대성산 정취암(大聖山 淨趣庵)

천년의 향기.. 꼬리 아홉달린 여우의 전설에 젖다.....!

[2012.06.12 바다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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