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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사,천년지장도량 남해 호구산 용문사에 걷다

바다늑대FORCE 2016. 8. 23. 14:41

 

용문사,천년지장도량 남해 호구산 용문사에 걷다

 

♣용문사[龍門寺]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 용문사길 166-11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의 말사

055-862-4425

♣ 찾아가는길

    남해고속도로(진주ic)→남해고속도로 하동,진교IC(19번국도)-남해대교-남해읍-이동면-앵강삼거리 우회전

- 용소마을-미국마을(아메리칸빌리지)우회전-용문사

   

♣ 사찰기행일 : 2016.8.22(월)

♣ 용문사 개요: 

호구산(虎丘山)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용문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의

말사로  창건 연대는 신라 문무왕 3년(663) 신라 원효대사(元曉大師)가 금산(錦山)에

세웠다는  보광사(普光寺)가 뒤에 이곳으로 옮겨와 지금의 용문사가 되었다고 전한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사찰이 불타버리고 나서 여러차례 중건 하였다.

조선 숙종(肅宗, 1655~1720 재위) 때에는 인진왜란 당시 이곳의 승병(僧兵)이

활약한 공으로 인해 수국사(守國寺)로 지정되어 왕실의 보호를 받았다.

 

숭유억불정책을 국시로 삼고 있던 조선시대 현종 원년(1660)에 

남해향교와 용문사가 서로 마주 보고 있다고 사찰을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하자 백월당 대사가 남쪽에 있는 용소마을 위에 터를 정하고 용문사라 하였다. 
  

용문사는 802, 신라 애장왕 3년에 창건된 절로서

1592년 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이 절 승려들이 승병으로 참여해 왜군과 싸웠는데

그때 이 절이 불에 타 없어졌으며1661년 현종 2년에 학진(學進)

인근 보광사(普光寺) 건물을 옮겨와 중창하였다고 한다.

그 당시 보광사는 신라 원효대사가 세운 절이었으나 폐사 상태였다고 한다  

1661(현종 2)에 신운(信雲)이 탐진당(探眞堂)을 세웠고, 상운(尙雲)이 적묵당(寂默堂)을 세웠다.

1666년 대웅전을 지었으며 봉서루(鳳棲樓)를 창건하였다.

그 뒤 명부전·나한전·향적전·천왕각 등을 지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승병활동의 근거지였다는 사실은 용문사에 보관 중인

삼혈포라는 대포와 숙종이 호국사찰임을 표시하기 위해 내린 수국사 금패가

그 증거물로 전하고 있다. 

또 용문사의 약수는 천하에 맛있는 물로 소문이나 남해까지 와서 용문사

약수를 마시지 않으면 남해를 다녀오지 않은 것과 같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 용문사 찾아가는길

 

진주- 남해용문사 58.1km

하트3→→→→→사찰기행시작

 계속되는 폭염속에서 응봉산 산행을 마치고

용문사로 향했다......!

 

↗미국마을

용문사로 가는길은 미국마을 도로를 그쳐 가야한다

남해 미국마을은 독일 마을처럼
재미교포 20여 분이 모국에 들어와 노후생활을 위해 만들어진
재미교포들을 위한곳 이기도 하다.
주택은 그리 많지 않고 22개 동으로 되어 있으며
아직까지 펜션이나 민박집으로 활성화가 되는 것 같다.
동네의 규모는 그리 넓지 않고 정말 미국 자그마한 동네길을 연상케 해준다

 

↗용문사 일주문(一柱門)

용문사 일주문의 현판은 창암 이상만 선생의 글씨이고

현재의 일주문은 영주스님이 중건하였다 한다.

 

유희경선생이 지은 '용문사'라는  시비

일주문 뒤에는 조선 인조때 학자 유희경선생이 지은 '용문사'라는  시비가 있고

 용문사는 지장대도량임을 알리는 표석이 서 있다

 

 ↘부도탑 좌측에 있는 용문사 중흥 대공덕주로 모셔지고 있는 호은당 대사비

지금의 사찰은 용문사 중흥 대공덕주로 모셔지고 있는 호은당이 서기 1993년에 복원 중흥한 것이다

↗용문사 부도군(浮屠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25호)

조선조에 12명의 고승을 배출한 고찰임을 말해주듯이 부도탑이 사찰 입구에

단장되어 있고 용문사 일주문을 지나 우측에 위치한 12기의 부도전은

용문사가 선사를 많이 배출한 전통 사찰임을 말해주고 있는듯 하다.

 

↗용문사 도량앞

 

 ↗공덕전

 1칸 짜리 맞배지붕 건물은 공덕전인데

몇년전만 해도 여기 그 안에는 나무로 만든 오랜 장승이 서 있는데, 이 건물은 바로 그를 위한 거처이다.

이 장승은 용문사가 이곳에 뿌리를 1661년 이후에 절을

 수호하려는 목적으로 천왕각 입구에 세운 것으로 생각되고

장승의 목부분은 이미 사라지고 위정대장군(衛正大將軍)이라고 쓰인 몸체부분만 남아 있는데

이마져 아랫부분이 썩고 수명을 다해 비스듬이 기울어져 있었다 그래서 인지

지금은 편액이름도 바뀌었고 포화대화상 이 모셔져 있다.

용문사 천왕각(天王閣)

-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50호-

-양반들을 밟고 선 사천왕상

천왕각에 봉안되어 있는 사천왕은 제석천(帝釋天)을 섬기면서 불법에 귀의한 중생을 수호하는

 호법신장(護法神藏)이다. 사방을 수호 하는 사신(四神)은 동쪽의 지국천왕(持國天王),

남쪽의 증장천왕(增長天王), 서쪽의 광목천왕(廣目天王), 북쪽의 다문천왕(多聞天王)을 말한다.

용문사 입구에 위치한 이 전각은 1702년(숙종 28)에 처음 건립되었다고 하며,

정면 3칸, 측면 2칸 크기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사천왕상은 목조상으로 그 크기는 300cmx230cm이며, 왕관을 쓰고

 비파. 검. 용. 창을 각기 들고 있는 형상으로 조각되어 있다.

↗지국천왕, 증장천왕

 

 

↗광목천왕, 다문천왕

 

용문사의 사천왕상은 왕관을 쓴 목조상이며 다른 사찰과 마찬가지로

비파, 칼, 용, 창을 각각 들고 있으나 발밑은 다르다.

전국 3대 지장도량의 하나로 불리는 용문사의 독특함은 천왕각의 사천왕 발밑에서 잘 드러난다.

다른 절의 사천왕 발밑에는 마귀가 있는 반면 이 곳 사천왕 발밑에는 양반과 탐관오리가 짓눌려 있다.

이런 모습에서 권력을 탐하지 않고 오직 민초들의 곁에 있고자 했던 용문사의 참모습을 볼 수 있다.

네분의 천왕은 수행을 방해하는 악귀대신 양반 벼슬아치인 탐관오리를 발 밑에 밟고 있다.

가렴주구에 시달리는 중생들의 고통에 분노하며 그들의 편에 서려한 스님들의 자비심을 읽을 수 있다

용문사 사천왕의 발밑에 밟혀있는 것은 권력을 탐하거나 아첨하던 양반과 관리들이다.

여기서, 용문사의 정신이 잘 들어난다.

권력을 탐하지 않고 아부하지 않으며 민초들 곁에 있고자 했던 그 정신말이다.

 

사천왕은 악귀를 밟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나 용문사의 마구니는 악귀가 아니라

조선시대 갓을 쓴 양반과 탐관오리의 모습들이다.

조선시대의 배불숭유(排佛崇儒) 정책이 빚은 불교의 폐해는 엄청난 것으로

 조선 중엽에 이르러면 불교의 박해는 극에 달하는데

 사찰의 토지는 대부분 서원에 빼앗기고 승려들을 핍박하기 위하여 종이, 붓, 노끈, 짚신, 새끼, 지게 등

 그리고 특수 곡물 등 온갖 농작물에 이르기까지 무려 36종이나 되는

 물품울 만들어 바치게 하는 부역이 부여되었다.

그래서 승려들은 자신들의 공부는 전혀 돌아볼 겨를도 없이

 오로지 일생을 나라에서 부과된 부역에 종사하기도 바쁜 나날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조선시대 천민들에 군림하던 양반들과 탐관오리들의 횡포가 얼마나 심했으면

 이들을 생령과 같이 취급하며 천왕의 발아래 밟히도록 하였을까?

이 조각상이야말로 숭유억불의 조선시대에 사찰이 처했던 고통과 비애를 알게 해 주는 근거가 되며

 고통에 시달리던 민중들과 함께 분노하며 민초들의 편에 서려고 했던 스님들의 심경을 잘 읽을 수 있다.

일반 사찰에서의 생령좌의 모습은 대개 악귀의 모습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지만

 이처럼 때로는 인간의 모습으로 그 시대의 한 단면을 반영하여 표현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일반적으로 사천왕상이 있는 전각은 천왕문으로 부르는데

여기서는 특이하게 문()이라고 하지 않고 각()이라 하여

 한층 더 격이 높은 '()'이라는 존칭을 부여하고 있다.

↗천왕각을 지나면   3시방향으로 꺽여져 두 번째 돌다리가 나온다

돌다리 아래 무더운 여름속에서도 아직 촉촉히 젖어있는 계곡물이 있다

두번째 돌다리를 건너면 웅장한 봉서루 누각이 나온다

 

↗ 봉서루(鳳棲樓)

봉황이 산다는 봉서루(鳳棲樓)

용문사의 정문으로 대웅전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으며, 설법전으로 사용하고 있다.

산지중정 가람의 누하 진입이 가능한 산지가람의 전형이다.

봉서루는 용문사에 보관중인 ‘호구산용문사봉서루병서(虎丘山龍門寺鳳棲樓序)’에는

 전각의 내력이 전해온다고 한다.

봉서루 현판은 1720년에 썼는데, 용문사는 1720년 이전 여러 차례 불이 나

 전각이 전소되는 일이 자주 발생하였다.

 결국 스님들은 그 이유를 용문사의 풍수지리형국에 기인 하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즉, 호거산 호랑이며, 용문사는 용이 들어선 절이기에

 용호상박의 한 치 양보없는 형국으로 기운이 강해 화재가 빈번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하여 용과 호랑이의 성정을 다스려 기를 누르려는 비보책으로

 봉황을 설정하여 누각 이름을 봉서루로 명명했다는 것이다

어두운 봉서루 밑을 지나간다. 계단으로 된 누하문(縷下門) 한 발짝 두 발짝 딛고 올라간다.

 올라갈수록 쏟아져 들어오는 빛이 양이 많아지고 사위가 점점 환해지기 시작한다.

이윽고 계단 중간에 올라서자 대웅전이라 쓰인 현판이 보이고

 날아갈 듯 떠 있는 대웅전의 지붕이 눈에 들어온다.

어둠과 빛은 극명한 대조를 빚어낸다.

어둠은 사람을 긴장시키며 빛은 그 긴장으로부터 놓여나게 한다.

봉서루 누하(樓下)의 엷은 어둠은 절로 들어가는 사람의 마음 속에서 잠시 긴장을 유발한다.

렇게 해서 속(俗)의 공간에서 성(聖)의 공간으로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으로 몸을 들여놓으려는 사람에게 무언의 가르침을 던져준다.

그리고 은연중 몸을 구부리지 않으면 누하(樓下)의 계단을 오를 수 없게 한다.

 부처님이 계시는 극락정토로 들어가려는 자에게 다시 한 번 겸양과 겸손을 가르치는 것이다.

계단은 오르는 자에게 가벼운 상승감을 안겨줄 것이다.

아마도 이 모두가 절집을 찾는 사람들에게 더욱 극적인 감동을 안겨주려는 건축적 장치가 아닐까 싶다.

그렇지만 봉서루는 계단을 막고 봉서루 밑을 지나 오른쪽 돌계단으로 오르도록 하고 있다.

 

구유(구시통)

봉서루 밑에는 '구유(일명 구시통)'이 길게 잘리잡고 있다.

 많은 대중들의 밥을 퍼주는 함지통이라 할 수 있다

본시 구유는 아름드리 통나무속을 파내고 마소의 먹이를 담아주는 큰 그릇인데

많은 신도들이 운집하는 법회나 대작불사를 회향할때와 유사시

 승병들의 밥을 퍼주던 용기로 발전하였으며

 1000명분의 밥을 퍼 담았을 정도로 큰 그릇이다.

임진왜란때 승병의 밥을 퍼 담아쓰던 밥통으로도 전해온다.

통나무 몸통 둘레 3m, 길이 6.7m나 되는 거대한 밥통이다.

 

↘봉서루 좌측에 있는 돌계단

차곡 차곡 나즈막히 샇아올린것 예술품 같아 보인다

이길은 곧장 차밭으로 가는길 인가 보다

↗용문사 약수

물이 좋기로 유명한 용문사 약수가 흐르는 석조 물확

 

 

↗용문사 대웅전(大雄殿, 경남유형문화재 제85호) 

봉서루와 마주하고 있는 대웅전은 숙종 29년(1703)에 성화 스님이 낡은 대웅전을 고쳐

새롭게 지은 전각으로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법당 건축물이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지붕으로 겹처마의 덧서까래가 길어서

 전체적으로 지붕이 위로 휘어져 들려 보이며 네 귀퉁이에 추녀를 받치는 기둥인 활주가 있다.

건물 처마 아래에는 여의주를 입에 문 용의 머리가 장식되어 있다.

대웅전 내부에는 목조 아미타삼존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모시고 있으며,  뒤에 걸린 영산회상탱화는 건양 2년(1897)에 조성된 것이다.

대웅전은 현종 5년(1666)에 일향스님이 건립하고 제해스님이 윤색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현재의 대웅전은 숙종29년( 1703)에 성화스님이 주창한 것이다.

포작은 외 3출목 내 4출목이며 첨차의 길이는 그리 길지 않다.

출목첨차의 하단부는 교두형으로 단순하게 처리되어 있으나 살미첨차는 화려하기 그지없다.

 살미첨차는 길게 뻗어 나온 쇠서 위에 연꽃을 사실적으로 조각하여

 마치 포작 전체가 연꽃으로 피어나는 듯이 보이게 한다.

대웅전은 팔작 지붕의 목조와가로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多包係) 팔작(八作)건물로 만들어 외삼출목의 포를 짜 올렸다 .

외부의 공포도 가히 환상적이다..

정면 앞 처마 밑의 공포는 용들이 남해를 집어 삼킬듯 으르렁 거리고..

측면의 포작들은 연꽃으로 수놓아져서 연화회상을 연상케 한다.

 

↗대웅전 내부

대웅전 안에는 아미타3존불좌상과 여러 개의 불화(佛畵)가 있다.

 불단(佛壇)에는 17세기에 만들어진 석가 3존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문화재청에는 아미타3존불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아미타불로 보는 것은 아마 수인(手印)이 아미타구품인(阿彌陀九品印)을 취하고 있어서 그런 것 같은데

석가불(釋迦佛)이 아미 타수인을 취한 것은 조선시대 불상에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으로

 대웅전이라는 편액을 보아 석가3존불로 보아야 할 것이다.

가운데 석가본존불(本尊佛)이 있으며 좌우로

화려한 보관(寶冠)을 쓴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이 좌정하고 있다 

이들 불상에는 복장공(腹臟空)이 열려있으며, 그 안에 들어있던 복장유물은 거의 도난을 당했다고 한다.

영산회괘불탱-보물

삼존불 뒤에는 석가불이 영취산(靈鷲山)에서 설법을 하는 장면을 그린 영산회상탱화가 있다.

괘불탱은 야단법석 등 절에서 큰 법회를 할 때 법당 앞뜰에 거는 대형 불교 그림이다.

1769(영조 45)에 만든 용문사 괘불탱은 가로 5.8m 세로 8.6m 크기로

18세기 중반 이후 불화의 전형적인 양식을 띠고 있으며

본존불상 좌·우에 협시보살상만을 배치시켜 삼존도 형식을 보여주고 있는 그림이다 

중앙의 본존불상은 어깨가 훤히 드러난 오른손을 길게 내려뜨리고

 왼손을 가슴 앞까지 들어올린 채 두 발을 좌·우로 벌려 연화좌를 딛고 서 있는 입불상으로

 둥글넓적해진 형태에 눈··입이 작게 묘사되고 미소가 잘 보이지 않는 경직된 표정의 얼굴은

 수평으로 들어올려 각이 진 어깨와 더불어 18세기 후반 이후 불화들에서 주로 나타나는 전형적인 양식 특징이다. 

좌협시보살상은 보관을 쓰고서 여의를 들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석가모니불의 좌협시인 문수보살상이라 추정된다.

머리 크기에 비하여 어깨가 좁아지고 작아진 발로 인하여 위축된 느낌이 들긴 하지만,

 팔에 걸쳐 흘러내린 길고 굵은 천의자락으로 인하여 전체적으로는 안정감이 있어 보인다  

우협시보살상 또한 좌협시보살상과 표현이 유사한데 연꽃가지를 받쳐 들고 있다

 그림 아랫쪽에는 화기(畵記)가 남아 있다    

괘불탱화는 1769년도에 제작된 불도로 인물의 형태 및 표정

 신체비례 등이 18세기 중반 이후 불화의 전형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경직된 듯 조화롭고 세련된 표현기법을 보여줘 18세기 중반 이후

 불화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어 2005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 괘불탱화는 20121억 원이 넘는 비용을 들여 보수를 하였으며 대웅전에 걸리면서

 1970년대 이후 40여년 만에 대중들에게 공개되었다  

 

↗탐진당(探眞堂)

 

 

↗적묵당(寂默堂)

 

용문사 명부전(暝府殿,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51호)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조선 현종 3년(1662)에

건립되었으며, 미륵불이 출현하기까지의 무불시대에 육도의

 중생을 교화 구제하는 보살인 지장보살을 모시고 있다.

지장보살은 매우 정교한 솜씨로 표현되었으며,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직접 조성하여 백일기도를 드려서 대도성취의 기율을 잡았다는 설이 있다.

용문사 용화전(龍華殿)

용문사 석불(경상남도 유형문화재자료 제138호) 

이 불상은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용문사를 재건할 때 경내에서 출토된 것이라 한다.

본래는 화강암 석재로 앉아있는 보살(菩薩좌像)의 모습을 조각한 것이었는데,

 뒤에 흰색의 회(白灰)를 덧칠하여 본래의 모습이 많이 손상되었다.

사각형에 가까운 얼굴이 크고 풍만한데 비해 상체는 어깨가 좁고 왜소해 균형을 잃고 있다.

또 상체에 비해 하체를 너무 간략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이러한 점은 고려시대 불상의 한 특징이다.

양쪽 어깨를 타고 내린(通肩) 옷자락(法衣)은 양어깨와 팔을 감싸면서 무릎을

 덮고 있는데 옷자락이 두꺼워 사실감을 잃어버리고 있다.

왼손은 무릎 위에서 성스런 병(寶甁)을 쥐고 있으며, 오른손은 가슴 위로

 들어올려져 있는데 원래 이 손은 연꽃가지를 들고 있었던것 같다.

머리에 쓴 보관(寶冠)은 화려한 장식과 채색으로 꾸며져 불상의 품격을 높여주고 있다.

손에 병을 들고 또 관을 스고 있는 모습으로 보아 장래 부처님이 자리를 대신한다는

대세지보살인 듯 하다. 미륵보살상은 독립불상으로 모셔지는 경우가

극히 드물며, 관음보살과 함께 좌우에서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다.

조각 수법으로 보아 고려 중기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삼소당(三笑堂)

용문사 범종각

↗대웅전 뒷편으로 잘 단장된 길을 따라가면

산전 산신각이 나온다

↗용문사 영산전(靈山殿)

 

용문사 칠성각(七星閣)

 

↘자생식물단지

자생식물단지는 어떤 곳일까 궁금해서 작은길 따라 가보면.....

↗삼자원

삼자원이란 남해의 대표적인 삼자,비자,유자,치자를 심어놓은곳이다.

 

↗녹차밭

용문사에도 녹차밭이 조성되어 있었다

주로 경남 하동에 야생녹차가가 많고 쌍계사주변에도 녹차가 많은데

쌍계사 말사라 그런지 녹차밭이 조성되어 있다.

 

↗녹차밭에서 바라본 용문사

저멀리 남해바다가 보인다

 

 

↗무인찻집

용문사 경내를 다 둘러보고 봉서루 우측에 있는 무인 찻집이 있다

잠시 휴식과 물 한모금 마시고서......↘

용문사 소장 문화재로는 쾌불탱호(보물 제 1446호)를 비롯하여 유형문화재 7점,

지방문화재 2점, 문화재자료 7점을 보관하고 있는 전통사찰이다

또한 용문사는 1996년부터 템플스테이 사찰로 지정, 운영되고 있어

템플스테이 안내와 좋은글이 붙어 있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모두가 꿈 속의 일인 것을

저 강을 건너가면

누가 너이고 누가 나인가

 

누구나 한번은 저 강을 건너야 한다.

나 또한 다를 바 없어

곧 바람 멎고 불 꺼지리라

 

꿈 속의 한평생을 탐하고 성내면서

너니 나니 하고 다투기만 하는가

 

-경허선사-

 

 

용문사,천년지장도량 남해 호구산 용문사에 걷다

인용글 : 자료 인터넷사전 및 용문사, 남해군청 홈페이지 전통사찰관광정보홈페이지자료등 참고함.

바다늑대Forever[2016.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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