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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사[玉泉寺] 불교문화 그리고 짙은 가을풍경 속 가을비에 젖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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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사[玉泉寺] 불교문화 그리고 짙은 가을풍경 속 가을비에 젖다

바다늑대FORCE 2013. 11. 11. 15:35

 

옥천사[玉泉寺] 불교문화 그리고 짙은 가을풍경 속 가을비에 젖다

 

2013년11월9일

소방의 날이기도 하다

11월9일=119

 

시간이 여의치 않아 가까운 가을풍경과

사찰기행에 나섰다...!

 

졸려

▣ 옥천사[玉泉寺]

 

위치 :경상남도 고성군 개천면 북평리

☞찾아오는 길 

대중교통편

1. 시외버스
부산에서는 시외버스터미널(동래, 사상)에서 옥천사 행 버스가 있다.

이 버스가 마산남부터미널과 배둔, 개천을 거쳐 옥천사로 온다.

진주에서는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옥천사행 버스가 있다. 이 버스는 개천을 거쳐서 옥천사로 온다.

 

2. 옥천사 버스운행
매월 음력 1일과 15일에는 옥천사 버스가 운행된다.
진주 역에서 9시에 출발하여 옥천사로 온다.

 진영 읍에서는 7시 10분에 출발해서 창원과 마산, 진동, 배둔을 거쳐 옥천사로 온다.

 

승용차편

1. 서울 방면 : 경부고속도로 북대전 나들목에서 대전-진주 간 대진고속도로로 바꿔탄 뒤, 서진주 나들목으로 나온다.

 여기에서 통영 가는 2번국도로 가면 당항포 국민 휴양지 입구가 나온다.

그 입구에서 500m 쯤 지나면 연화산 도립공원이라는 팻말이 보인다.

우회전하여 조금 지나면 옥천사가 나타난다.

 

2. 부산 방면 : 남해고속도로로를 타고 동마산 나들목에서 마산으로 향하는 14번국도를 탄다.

 배둔에서 당항포 국민휴양지로 향한다. 노정은 마산에서 46㎞, 진주에서 32㎞.

 

3. 광주 방면 : 남해고속도로를 타서 진주 나들목으로 나와 대진고속도로 바꾼 다음 고성 나들목으로 나온다.

↗ 옥천사 가는길

   가을비가 촉촉히 내려 단풍과 가을낙엽이 어우러져

   너무 아름답다.......!

 

↘ 일주문이 보인다

  가을비에 젖는 단풍이 하나의 수채화 같다.....!

 

↗연화산 옥천사 일주문

  일주문은 1984년에 조성된 전각이다.
  일주문의 의미는 사찰의 입구로서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이 나누는 경계라고 할 수 있다.

↗천왕문 

↗하마비

 천왕문을 들어서면 좌측에 있는 下馬碑

하마비란 누구나 이 앞에서부터는 말이나 가마에서 내려 예를 갖추고 걸어서 들어가야 함을 알리는 비석이다.

 대체로 긴 사각형으로 만들며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 혹은 그냥 단순히 ‘하마비(下馬碑)’만 새겨져 있다.

주로 궁궐, 사당, 주요 인물 묘소, 그리고 주요 사찰 앞에 하마비가 세워진다.

  특히 사찰의 하마비는 숭유억불의 조선시대에 유생이나 관인들의 무분별한 사찰 출입을 막기 위해 세웠다.

경내의 질서와 수행환경을 위해 큰 역할을 해주었다.

 ↗범종각

꽃향기로 채워지는 옥천사 자방루

천왕문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꽤 넓은 공간을 가로막아 절집을 보호하고 있는 듯한

 영조 40년(1764)에 뇌원(雷遠)대사가 초창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3호 ‘옥천사 자방루(玉泉寺滋芳樓)를 만난다.

 정면 7칸, 측면 3칸의 주심포계 팔작지붕의 건물로 기둥사이를 모두 두터운 문으로 막고 오직 앞마당과 면하는

전면만을 개방하여 큰 성채를 방불케 한다.
성채와 같은 자방루는 조선 후기 사찰건립의 또 다른 측면을 보여주고 있는데,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초토화되자 국가가 승병을 기르는 호국사찰을 건설하면서 사찰도 보호하고

군사용 회합장소로도 사용할 목적으로 외곽 방어용의 커다란 ‘자방루’와 같은 건물을 짓게 된 것이다.

↗ 옥천사 자방루 내부

 자방루(滋芳樓)’란 “꽃다운 향기가 점점 불어난다,”란 말로 “불도를 닦는 누각”이라는 뜻을 지녔다고 한다.

‘자방루(滋芳樓)’ 건물의 정면에는 영조 때 이조참판을 지낸 조명채(1700~1764)의 편액이 걸려있고

 반대편 대웅전 마당 쪽에는 '연화옥천(蓮華玉泉)'이라는 추사의 수제자 위당(威堂) 신헌(申櫶, 1811~1884)의

예서체 글씨로 쓴 현판이 걸려있다.

 네 개의 기둥 중 2번, 3번 기둥에는 용두가 쌍방으로 조각되어 있고,

 지붕 밑의 장혀와 창방에 그려진 화조도와 풍경화는 120년 전 중수 당시의 단청그림이다.

‘자방루’에 앉아 기둥과 기둥사이의 나무문을 열고 밖을 보면 그 자체가 하나의 동양화가 되어 돌아온다.

 

 ↗ 템플수행관  & 茶 와 휴게실

 ↗청담 대종사 사리탑비

청담스님은

청담의 생애는 곧 한국 근세사의 한 단면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생애가 당시의 역사와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지만, 대부분 그대로 거기에 묻혀 버리게 된다.

 이 것은 결코 비겁한 것이 아니라 필연적인 숙명이다. 그러나 청담은 그 역사의 뒤안길로 스며들어 사라지는 것을 거부한 수행자이었다.

끊임없는 도전과 창조를 통하여 자신이 새 역사 창조의 주역이 되기를 바랬던 생애이었다.  

그는 결코 산 속에서만 은거하던 소극적인 수행자가 아니었다. 바깥 세상에서 불타의 正見을 펴기를 서원한 수행자이었다.

 근세의 고승들이 그들대로의 투철한 정진을 통하여 자기 세계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면 ,

청담은 그러한 내면적 견성(見性)보다는 중생 속에서 자기의 원력을 성취함으로써 성불에 갈음하고자 했다.  

청담은 1902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다. 그 때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기 3년 전이니 우리나라는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순간이었다.

청담은 할아버지의 고집으로 서당에 다니다가 18세의 늦은 나이에 중학교에 들어가고 3.1만세운동에 참여한다.

그리고 22살에 진주농고에 입학하게 되는데, 이 때 그는 이미 결혼한 몸이었다.

우연히 호국사에 놀러 갔다가 박포명(朴抱明)스님을 만나 출가를 결심하지만 해인사 등에서는 그가 旣婚이었음으로 출가를 거절한다. 

청담은 일본 유학을 결심한다.  그리고 일본 송운사(松雲寺)에서 9개월 동안 행자 수업을 하였다.

 1년 반만에 귀국한 청담은 마침내 고성 옥천사(玉泉寺)에서 머리를 깎고 청담(靑潭)이라는 법명을 받게 된다.

이듬해 속가(俗家)에 들른 청담은 어머니의 " 代를 이어야 한다는" 간곡한 부탁을 받고, 부인과 속연(俗緣)을 맺는다.

지금의 묘엄(妙嚴)스님이 바로 청담의 딸이다.  

그리고 그는 가족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서울로 향한다. 청담은 후일 " 부끄러운 파계이었지만,

그로 인해 어렵고도 괴로웠던 정진에 도움이 되었다 "라고 당시를 회고하였다. 

서울로 온 청담은 박한영(朴漢永)스님, 만공(滿空)으로부터 수행을 배우는 동안에도 항일운동을 멈추지 않아 문경 대승사에서 왜경에 체포되어

  7개월간 옥고를 치루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점차 倭色化되어가는 한국불교를 위행 승단의 정화에 몰두한다. 

특히 청담은 대처승(帶妻僧)의 존재를 강력히 부인하였다. 대처승은 바로 일본불교의 상징인 것이었다.

 한국불교의 통합을 위하여  전국승려대회를 열고, 宗團의 통합을 이루어냈지만, 조계종과 태고종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항일운동으로 옥고까지 치룬 청담은 대처승 문제에 강경하였고,  과격하게 대처하였다.

1966년 청담은 한국불교의 최고 지도자인 宗正에 추대된 청담은 그 자리를 내놓고 이 곳 道詵寺에 들어 와 호국참회원 건립에 참여한다.

 반면 이때부터 비구승단인 조계종에 宗權 다툼이 시작되었다. 

청담은 이러한 사태에 " 한국 불교는 절간만 남았다. 이제 종지(宗旨)는 사라졌다 "고 개탄하며 화합을 호소하였지만 누구도 그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1969년 청담은 조계종을 탈퇴하지만, 이듬해 종단의 간곡한 호소로  70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총무원장을 다시 맡게 되었다. 

 청담은 한국종교협의회 회장을 맡아 종교간의 유대와 화해를 주도하였고,

 세계 공승법회를 주재하여 한국불교의 세계화를 시도하였다.그러나 이미 노령인지라 몽은 쇠약하여,

마침내 1971년 11월 15일 도선사에서 입적하였다. 세수(世壽) 70세, 법랍(法臘) 45세이었다.

 

 

 ↗해탈문

해탈문을 들어서면 대웅전이 보인다

↗옥천사 대웅전

☞창건역사

옥천사는 676년(문무왕 16) 의상 대사가 중국에서 귀국하고 전국에 화엄학을 널리 알리기 위해 세운 열 곳의 사찰

이른바 화엄십찰(華嚴十察) 가운데 하나로 지어졌다.

 이 같은 사실은 신라의 대문장가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도 나와 있다.

또한 하동 쌍계사에 있는 진감국사비에도 옥천사에 대한 내용이 있어 창건 시기를 확실히 알 수 있다.

898년(효공왕 1) 진경국사 심희(854~923)가 제2차 중창하였는데 창건 이후 최대의 규모로 확장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에 들어와서는 964년(광종 15) 혼응 스님이 혜거 대사와 함께 제3차 중창을 하였다.

1110년(예종 5) 혜은 스님이 쇠락한 절을 다시 중창하였는데 이것이 제4차 중창에 해당한다.

1236년(고종 23)에 나라에서 대장경 판각불사를 하기 위해 진주에 분사(分司)를 두었을 때 옥천사의 보융 스님이 교증(敎證)이 되었는데,

 이 때 옥천사의 제5차 중창을 이루었다. 제6차 중창은 1371년(공민왕 20) 지운과 원오 스님이 이루었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겨우 법등만 이어가다가 임진왜란으로 모두 불타버렸다.

그 뒤 1639년(인조 17) 학명 대사가 신인(神人)의 계시를 받아 이 곳을 찾아왔는데, 한 눈에 명당터임을 알고 의오 스님과 함께 중창불사를 시작하였다.

1644년 먼저 동상당(東上堂)을 지은 다음, 이듬해 심검당을 세웠다.

그리고 1654년(효종 5) 법당을 지었으며, 1664년(현종 5) 정문을 지어 제7차 중창을 완성했다. 

1677년(숙종 3) 묘욱 스님이 법화회를 개설한 다음 불사를 주도하였다. 묵루당, 향적전, 만월당을 짓고, 이듬해 관음전을 비롯하여 청계당, 옥련암을 지었다. 1680년에 극락전과 산내암자로 청련암, 백련암을 세웠고, 1730년(영조 6) 시왕전을 지었다.

불사는 계속 이어져, 1764년 뇌원 스님이 자방루를 지었는데, 당시의 절 규모는 요사 5동,

산내암자 일곱 곳이 있었으며 물레방아가 12개나 있을 정도로 절의 살림살이가 늘었다. 이로써 제8차 중창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1800년(정조 24) 나라에 종이를 바쳐야하는 진상(進上) 사찰로 지정됨으로써 사역(寺役)이 가중되어

 피폐되기 시작하였고, 급기야 부역을 못이긴 승려들이 도망가는 등 사세가 급격히 줄어들어 버렸다. 

1888년(고종 25) 요사인 적묵당과 탐진당을 중수하여 서서히 사세 회복을 시작하였고,

1890년 왕실의 원찰이 됨으로써 비로소 관과 세도가의 핍박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1890년 동학운동으로 자방루, 탐진당, 적묵당, 대웅전, 팔상전, 금당 등 수많은 전각이 불타 없어졌으나,

 1895년 명부전과 나한전을 중건하였고, 1897년 칠성각, 독성각, 산신각을 중건하였다. 이 때를 제9차 중창으로 볼 수 있다. 

제10차 중창은 근대에 들어와 청담 스님에 의해 이루어졌다.

 불교정화와 신도 교화에 많은 힘을 쏟은 스님은 1971년에 입적할 때까지 옥천사의 사세 회복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최근에 와서는 백련 상오 스님이 1984년 일주문을 지은 것을 시작으로 1985년 조사전, 1987년 사적비를 건립하여 제11차 중창을 이루었다. 

그리고 불사는 이어져서, 호암 지성 스님이 1989년 사천왕문, 1990년 범종각,

 1999년 유물전시관과 축성전 등을 지으며 제12차 중창을 이루어 지금의 옥천사의 모습을 갖추었다.

 ↗대웅전의 안에는 나무로 조각된 불단위에

 석가모니부처님과 문수, 보현보살로 보이는 보살상이 협시를 이루고 있다.

성보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명부전

1985년 11월 14일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146호로 지정되었다. 신라
시대인 676년(문무왕 16)에 의상(義湘)이 세운 옥천사 경내에 있는
건물로, 1730년(영조 6) 옛 궁선당지(窮禪堂址)에 건립되었고, 조선
중기에 중건(重建)하였다.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운동으로 불타자
이곳으로 이전하였고, 불타지 않은 오른쪽 건물에 축성전(祝聖殿)의
현판을 걸고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였다고 전해진다.
정면 4칸, 측면 3칸의 건물이며 현판은 건립 당시인 영조 때 기성(箕
城)이 썼다고 전해진다. 경내에는 지옥중생(地獄衆生)을 제도하는
지장삼존(地藏三尊)과 시왕상[十王像] 등 명부권속상(冥府眷屬像)이
모셔져 있다. 좌우 문지기인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은 이곳으로
이전할 당시인 고종 때 새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팔상전

 

↗옥천사 독성각 (1897년 건립)
- 나반존자탱화 봉안 -

↗옥천사 조사전[祖師殿]
- 1985년 축성전(祝聖殿)을 이건(移建)하여
개산조(開山祖)의상대사와 고승의 영정 봉안 -

↗칠성각(七星閣)

 

↗옥천사 玉泉 샘
옥천사란 절 이름은 옥천(옥천)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신라 문무왕 16 (676년) 이 절을 창건하기 전부터 있었던
샘이다.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다고 하며 옛부터
병을 고치는 감로수(감로수)로 유명하며 한국의 100대
명수(명수)에 올라 있다. 연화산에는 암수 옥천이 있다고
전해 오는데 산속의 물 무덤이 아래에 있는 샘은 수샘이고
옥천사의 옥천은 암샘이라고 한다.

 

 ↗탐진당

  내부수리중 

↗적묵당

??옥천사의 전설

사찰에 있는 샘에서 물이 아닌 공양미가 나온다면 누가 믿겠습니까. 매일 일정량의 공양미가 나오는 玉泉(옥천)이 있던 도량이 바로 고성 옥천사입니다.

지금은 공양미 대신 맑고 맑은 물이 나오지만 옥천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산사를 찾는 이유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옥천사의 옥천은 우리들에게 황금 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어리석은 욕심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한꺼번에 많은 쌀을 얻겠다는 욕심으로 바위를 깨뜨려 결국 영원히 공양미가 얻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욕심은 영원한 자비심까지도 파괴한다는 가르침을 설하였다고 생각합니다.  

부처님의 자비심을 베풀어 공양미 대신 맑고 맑은 신비한 샘물을 다시 주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었습니다.

 영험이 있는 약수라고해서 수많은 병자들이 몰려들어 목욕까지 하는 통에 신비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깨끗한 물만은 남겨주어 우리나라 10대 명수중 하나로 우리들에게 감로수를 주고 있습니다.  

옥천사를 찾는 사람들은 옥천의 물맛을 꼭 보고 내려갑니다. 옥천의 물맛은 물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물을 마시는 우리들의 마음속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옥천은 단순한 샘물이지만 부처님 가르침이 녹아 있기 때문에 감로수 입니다.

 뿐만아니라 인간들의 어리석음, 스님들의 수행원력 등을 다 담고 있습니다. 

의상스님이 국내의 영지를 가려 많은 사찰을 세운 사찰을 화엄십찰이라고 일컫는데 그 중의 하나가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창건한 연화산 옥천사입니다.

연꽃이 반쯤 핀 모양을 한 연화산의 옛 이름은 비슬산이었는데,

폐허나 다름없던 옥천사가 인조 때 중창되면서 산 이름도 연화산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옥천사라는 이름도 맑은 물이 샘솟는 경내의 옥천(玉泉)샘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단풍에 물던 옥천사 앞뜰 개울

 

↗청련암 가는길 

닥종이 솥 
 옥천사는 정조 말기에 "어람지 진상사찰"로 지정되어 철종14년(1863) 해제될 때까지 60여 년 동안 닥종이 제조 부역에 시달렸다.

 스님들은 공양만 먹으면 닥나무 껍질을 벗겨 끓인 후 이를 찧어 계곡물에 일렁거려 종이를 뜨는 노역에 시달렸다.

 노역에 질린 스님들은 하나 둘 떠나기 시작,  정조말기에 340명을 헤아리던 스님 숫자가 철종 15년 해제될 때는 10여명이 남았다 한다.

옥천계곡에서 자라는 닥나무는 품질이 좋은데다 색색으로 물을 들여 진상하였으므로 조정에서는 옥천사 닥종이를 최고로 쳐주었다.

이 때에 쓰던 유물로서 유일 하게 남아 있는 것으로 지금 청련암에 무쇠솥이 남아 있다. 닥나무 껍질을 벗겨 이 솥에 넣어 끓이던 유물이다.

☞ 청련암 

청련암은 옥천사의 첫손가락 꼽을 수 있는 산내암자이다.

창건년대는 1678년(조선, 숙종4년)으로 기록 되어 있으며, 창건주는 묘욱선사(妙旭禪師)라고 하나 자세한 것은 알 수가 없다.

 묘욱선사는 1677년 대규모 중창불사를 하여 가람을 새롭게 일신한 대공덕주였는데, 이 무렵 청련암도 창건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이후 청련암은 여러 차례에 걸쳐 중창, 중건되었겠지만 1895(고종32)에 化主수룡, 화용스님에 의해 중창된 사실은 기록에 전해오고 있다.

 그리고 1901년에는 청련암의 아미타여래도가 조성 봉안되었으니, 이 불사는 금남치구(錦南致口)스님이 도감의 소임을 맡고,

 기운과연(奇雲斗演)스님이 화주가 되어 이루어졌다.

 청련암이 창건된지 2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많은 고승 대덕이 주석하며, 법등을 이어 왔는데,

특기할 만한 사실로는 서봉(瑞峯)스님의 방광(放光)과 기운스님·영송(永松)스님의 이적(異蹟) 및 서응(瑞應)스님의 만일계(萬日契) 결성 등을 들 수 있다.

 현 감원인 승욱(昇旭)스님 소임을 맡으시 이후로 큰 법당의 개수와 천불전, 요사채, 산신각 등을 건립하여 가람을 쇄신함과 더불어,

1997년 서응스님의 만일계 정신과 동체대비의 근본정신을 살려“정토만일봉사회”를 결성하여 불교사회복지를 실천하고 있다. 

옥천사[玉泉寺] 불교문화 그리고 짙은 가을풍경 속 가을비에 젖다

 하트3

단풍 그리고

비에 젖은 가을모습

불교문화에 험벅 젖어 돌아왓다....!

 

바다늑대Forever[2013.11.09]

▣글 자료[사찰 홈페이지 및 인터넷자료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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