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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솔사[多率寺],아름다운 솔숲과 편백나무길 있는 봉명산 多率寺에서 茶香에 젖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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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솔사[多率寺],아름다운 솔숲과 편백나무길 있는 봉명산 多率寺에서 茶香에 젖다

바다늑대FORCE 2013. 12. 4. 15:46

 

다솔사[多率寺],아름다운 솔숲과 편백나무길 있는

                                  봉명산 多率寺에서 茶香에 젖다

 

고고

사찰기행 : 2013년12월4일 수요일

 

겨울의 길목에서

달랑 카메라 울러메고서 사찰여행에 나섰다

진주ic에서 순천방향 남해고속도로를 타고

30분정도 가다보면

곤양ic에서 빠져나와 봉명산 다솔사 가는길은

수확이 끝난 들판풍경 그리고

소박하고 정겨운 농촌마을이 조용히기만 하다....!

 

 사찰명 : 다솔사[多率寺]

      소재지 : 경상남도 사천시 곤명면

♣ 위치도

 

↗ 봉명산 주차장에 있는 약수터

 봉명산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서

 솔숲과 편백나무길을 걸어서 다솔사로 가는길은

 깨끗한 공기 그 자체였다.

 

♣ 다솔사(多率寺)라는 사찰 이름의 유래에 대하여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글자 그대로 소나무가 많은 곳이었기 때문이라는 설인데

이에 대한 문헌적 근거는 발견되지 않는다.

둘째는 이 절이 위치하고 있는 주산(主山)이 대장(大將)과도 같아

'군사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다 '는 의미에서 유래하였다는 설이다.

이러한 내용은 '다솔사명부전대양루사왕문중건기'에 전하는데, 그 관련 부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다솔사의 주악(主嶽)은 마치 전후좌우에 대궐을 지키는 병사들이 둘러처져 있는 것과 같은

대장(大將)의 모습으로 앉아 있다.

사찰의 이름을 이렇게 지은 것은 ' 많은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있는 것과 같다 '는 데에서 뜻을 취한 것이다. 

 ↗ 좌측길은 내려오는길인데 편백나무가 울창하고

    우측길은 올라가는길로서 소나무가 울창하다.

↘자연은 아름답게

   환경은 깨끗하게   1986년10월 문기호 증 이라고 되어있다

↗ 어금혈봉표 (御禁穴封表)

솔숲길을 걷다보면 우측 길가의 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에는 조선시대 고종(高宗) 22년에 쓴 비명(碑銘)이 새겨져 있다.

어금혈봉표 (御禁穴封表)라는 커다란 글씨와

광서십일년을유구월일 (光緖十一年乙酉九月日)

이라는 작은 글씨이다.

 

☞어금혈봉표(御禁穴封表)란

어명(御命)으로 다솔사 경내에 무덤을 쓰는 것을 금지한다는 의미의 표지석이다.

그리고 광서십일년을유구월일(光緖十一年乙酉九月日)에서

광서(光緖)란 청나라 연호로 고종 22년 9월을 의미한다.

??

 

어금혈봉표의 유래

1882년 구식 군대의 차별대우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여 일어난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여흥민씨(驪興閔氏)들이 살해 당하였다. 임오군란 당시 구식 군대의 추대로 흥선대원군이 재집권하고

명성황후는 홍계훈(洪啓薰) 등의 도움으로 이천, 장호원을 거쳐 충주로 피신하였다가 여주로 숨었다.

나라의 군사적 압력으로 임오군란은 진압되고, 흥선대원군은 청나라 텐진으로 끌려가고,

명성황후는 한성으로 돌아왔으나, 권력투쟁으로 조정은 매우 어수선하였다

그러다보니 지방관리의 기강이 해이해질 것은 당연하였다.

당시 경상감사가 봉명산 다솔사 자리가 풍수지리적으로 장군대좌혈인데,

이곳에 부친의 묘를 쓰면 가문(家門)이 일어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다솔사에 사람을 보내 이장(移葬) 준비를 지시하면서 다솔사는 발칵 뒤집혔다.

당시 수도승인 봉암스님을 중심으로 이와같은 탐관오리의 비행(非行)을 조정에 직소하기 위해

승려와 신도들의 연명을 맏은 탄원서를 모아 상경(上京)을 결행하였다.

기록에는 때마침 청나라로 가는 동지사(冬至使)를 만나 그 관리에게 하소연하였다고 되어 있으나,

그 시기를 고려할 때 동지사가 아니라 그 해 8월 국경회담을 위해 청나라로 향하던

토문감계사(土門勘界使) 행렬을 만난 듯하다.

동지사란 조선시대에 해마다 정기적으로 명나라와 청나라에 보내던 사신을 말한다. 

당시 토문감계사 대표는 이중하(李重夏)이었는데, 그는 성품이 강직하고

청렴하여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강직한 인물이었다.

이중하는 승려들로부터 이같은 지방관리의 비행을 전해 듣고

즉석에서 서찰을 적어주며 이를 경상감사에게 전하라며 행렬을 돌려 후에 高宗에게 보고하였다고 한다. 

승려들은 기쁜 마음으로 문경의 한 주막에서 밤을 보내게 되었는데

우연히 곤양군수로 부임해 가는 신임 목민관을 만나게 되었다.

인사를 고하고 그간의 사정을 아뢰자,

그 군수는 서찰을 자신에게 맡길 것과 부임 보고를 할 때 전하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마침내 부임 보고를 마친 신임 곤양군수는 다솔사(多率寺)의 일을 논하자,

경상감사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하지만 신임 군수는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 어명이요 ' 라고 외치며 ' 어금혈봉표(御禁穴封表)'라고 외쳤고,

경상감사는 무릎을 조아리고 벌벌 떨며 일어나지 못하였다.

그래서인지 거대한 바위에 쓰인 '어금혈봉표'의 '표(表)'가 일반적인 봉표(封標)의 '표(標)'와 같지 않음은

어명의 서찰을 옮겨 쓴 것이기에 그런가 추정하고 있다.

즉, 어금혈봉표는 임금께서 무덤을 막을 것을 명한다는  친서인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 봉표는 어명의 행정적 지휘인 반면에 다솔사 봉표는 직접적 지휘서신인 셈이다.

 이후로 다솔사 경내에는 어떤 무덤도 쓸 수 없었다.

 

 ↗법당가는길

 아직 경내에는 단풍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그리고

다솔사에는 현재 일주문이나 천왕문이 따로 없고 대양루를 통해 경내로 들어서게 된다.

경내에 들어서면 본전(本殿)인 적멸보궁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극락전과 응진전이 자리하며,

극락보전과 마주보며 대양루가 있다. 대양루 양쪽에는 요사가 각각 위치한다.

오른쪽에 있는 요사는 안심료인데, 종무소와 식당을 겸한다.

안심료 뒤에도 승방 등 여러 채의 요사가 있다.

↗대양루

대양루(大陽樓)는 다솔사의 경내 가장 앞에 있는 2층 누각이다. 적멸보궁과 마주하고 있으며

아래 ·윗층의 높이가 모두 13m로 전부 36개의 아름드리 큰 기둥이 육중한 건물 전체를 떠받치고 있다.

크기는 정면 5칸, 측면 4칸에 맞배집이다.

적멸보궁을 향한 쪽은 개방되어 있으나 좌우 양쪽과 뒷쪽에 벽을 설치하여 막았고,

뒷쪽에는 창문을 달아 놓았다. 앞마당과 누각의 마루는 떨어져 있고

오른쪽 퇴칸 앞으로 돌다리를 걸쳐 놓아 출입하도록 하였다. 

아래층은 본래 출입문 역할을 하였으나 누각 왼편에 새로 돌계단이 생기면서

지금은 칸막이가 생겨 창고와 기타 용도로 이용되고,

2층은 수도장일 뿐 아니라 불교신도들의 집회장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다솔사의 건물 대부분은 1914년 12월 7일에 발생한 화재 이후 3년에 걸쳐 중건한 것이다.

근래에 이르기까지 대양루 위에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필적인 「유천희혜(游天戱海)」라는

편액이 걸려있었으나 지금은 행방을 알 수 없다. 

영악사중건비(靈嶽寺重建碑)

이 비는 1704년(숙종 30)에 세워진 것으로 귀부와 이수가 갖춰있다.

귀부는 마모됐고 자연석으로 형체만 남아있다.

채팽윤(蔡彭胤)이 글을 짓고 이진휴(李震休)가 썼으며, 제액(題額)은 권규(權珪)가 썼다.

 

↗적멸보궁(寂滅寶宮)

다솔사 적멸보궁(寂滅寶宮)은 다솔사의 금당으로 경내보다 훨씬 높게 쌓은 축단 위에 자리한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규모이며 다포계에 내외 3출목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본래는 대웅전 건물이었는데 1978년 2월 8일 당시 대웅전 삼존불상의 개금 불사 때

 후불탱에서 108과의 사리가 발견되자 적멸보궁으로 바꾸고

불사리는 사리탑을 적멸보궁 뒤에 새로 만들어 봉안하였다. 

적멸보궁 안에는 닫집과 불단을 마련하여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기 전의 모습인

와불상(臥佛像)을 금동으로 모셨고, 그 뒤로 안상(眼象) 모습의 유리창을 내어

적멸보궁 안에서 뒤에 있는 사리탑을 바라보고 친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안에는 근래에 조성한 신중탱과 조선시대 후기의 동종(銅鍾)이 있다. 

 

☞주련(柱聯)은 전부 4점으로 이병희(李丙熙)의 글씨인데 네 번째 주련에

‘농암(農巖) 이병희’라는 관지(款識)와 ‘농천(農泉)’이라고 쓴 음양각 도서(圖書) 2과가 각각 있다.

주련의 내용과 뜻은 다음과 같다. 

 

念佛元非第一關(염불원비제일관) 염불은 본래 제일관이 아니요

參禪本是佛方便(참선본시불방편) 참선이 바로 부처님의 방편이라

成功方覺此身閒(성공방각차신한) 공을 이루어 깨치면 이 몬 한가하리니

묵契菩提大道心(묵계보리대도심) 보리의 대도심에 묵묵히 계합하리다

↗적멸보궁 벽화 팔상성도(八相聖圖)

석가모니 부처님의 일생 가운데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일을 여덟 장면으로 나타내어 표현한 그림

 

응진전(應眞殿)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680년(숙종 6)에 죽파 대사가 다시 세웠다.

그 뒤 낡은 건물을 1930년에 만해(萬海) 한용운(1874~1944) 선생이 보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극락전과 거의 같은 규모이고 세부 수법도 같아서 같은 시기에 중수된 것으로 보여진다.  

건물은 주심포계 이익공 집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이다.

안쪽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천장 속을 가린 우물천장으로 꾸몄다.

응진전에는 석가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고, 그 좌우로 11분의 나한과 시자상(侍子像) 2위를 모셨다.

석가여래좌상은 독존으로 유리장 안에 모셔져 있는데,

17세기 양식을 하고 있어 1680년 죽파 대사의 중건 때 함께 봉안된 것으로 추정된다.

 

↗극락전(極樂殿)

익공계 맞배집으로 규모는 앞면 3칸, 옆면 2칸이다.

 임진왜란 때 폐허화 되어 그 뒤 몇 차례 걸쳐 중건되었으나

1748년(영조 24) 다른 전각과 함께 소실되었다. 다시 중건되었으나

근래에 들어와 1941년의 화재로 또다시 없어졌다가 1942년부터 3년 간에 걸쳐 중창되었다.

 최근에는 1987년에 수리되었다.  

안에는 금동 아미타여래좌상을 독존으로 모셨는데 근래에 조성한 것이다.  

불화로는 삼장탱(三藏幀) · 칠성탱(七星幀) · 산신탱(山神幀)

 독성탱(獨聖幀) · 현왕탱(現王幀) 등이 봉안되어 있다.

모두 1920년에 금성 성전(錦城性典) 금어 등이 그렸는데

금성 성전은 1847년(헌종 13) 서울 흥천사(興天寺) 아미타후불탱

1890년(고종 27) 흥천사 신중탱 · 제석탱, 1895년(고종 32) 서울 봉은사(奉恩寺) 나한탱

 남양주시 불암사(佛巖寺) 괘불 제작에 참여했던 수준높은 화승(畵僧)이었다.  

극락전 외벽에는 여덟 면에 걸쳐 벽화가 그려져 있다.

 이 가운데 네 폭은 팔상도(八相圖) 등 불교에 관련된 것이고

 나머지 네 폭은 도교적 색채가 짙은 그림이다.

네 폭의 불교 관련 벽화는 중국의 혜가(慧可) 스님이 달마 대사에게 나아가 제자가 되는 과정을 그린 것.

 연등불(燃燈佛)에게 모래 공양을 올린 소년의 이야기,

부처님이 제자들고 함께 각지로 유행(遊行)할 때 백골에게 경배하던 이야기,

그리고 원효와 의상 스님이 중국으로 유학을 가던 길에 밤에

 목이 말라 해골을 표주박으로 알고 물을 떠서 마신 이야기 등이다.

 

↗ 종무쇼

 

↗다솔사 차 전시관[대양루2층)

 다솔사에서는 매년5월에 차 축체가 열린다

 

안심료(安心寮)

안심료(安心寮)는 1930년대에 지은 단층의 평범한 요사이지만

 만해 한용운 스님이 이곳에 기거하면서 한국 불교의 법맥을 이은 유서 깊은 장소이다.

 안심료 앞에는 측백나무 세 그루가 높다랗게 서있는데

한용운 스님의 회갑 때 지인(知人)들과 함께 심은 것으로 ‘황금측백 나무’라고 부른다.

 

↗ 다솔사 차밭

효당 스님은 『韓國의 茶道』라는 한국 최초의 차도 개론서를 저술하였으며,

다솔사에서 재배하는 차를 독특한 제다법으로 반야로라는 정제증차(精製蒸茶)를 생산하고

전수시키는 등 효당스님은 현대 차문화를 확립하는데 일조를 하였다.

지금도 다인들 사이에서 다솔사는 차문화 유적지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 다솔사 경내 아름다운 풍경들

  초겨울 날씨가 한겨울 날씨처럼 추운데도

  가을단풍이 아직 아름답다......

하트3

 

 ↗애민중생 미륵대성

 

다솔사 창건역사

창건 이후 다솔사의 역사를 전하는 자료는

「북지리산영악사중건비(1704년)」, 「다솔사명부전대양루사왕문중건기(1761년)」

「팔상전중수기(1779년)」 등 세 종류가 전해지고 있으며, 이 가운데

「북지리산영악사중건비」의 내용이 비교적 상세한 편이다.

이들 자료를 바탕으로 창건 이후 다솔사의 주요 연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연대 주요사항
503년(신라 지중왕 4)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영악사(靈嶽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함
636년(선덕왕 5) 자장법사가 중수하면서 다솔사(陀率寺)로 개칭함
676년(문무왕 16) 의상대사가 중창하면서 영봉사(靈鳳寺)로 개칭함
9세기 중후반 도선국사가 중건하면서 다솔사(多率寺)로 개칭함
14세기 중반 나옹화상 혜근이 중수함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사찰이 전소됨
1686년(숙종 12) 영일(靈日), 혜능(惠能), 사연(思衍), 자청(自淸) 등의 네 스님이중창불사를 시작함
1704년(숙종 30) 중창불사의 회향을 기념하기 위해 「북지리산영악사중건비」를 세움
1748년(영조 24) 화재가 발생하여 세 개의 전(殿)과 세 개의 당(堂)이 불에 타버림
1758년(영조 34) 1749년부터 명부전 ·대양루(大陽樓) ·사천왕문을 복원하는 불사를 진행하다가 이 해에 이르러 완성함. 이 때의 불사는 월징(越徵), 일진(一眞), 일휘(日輝) 등의 스님이 진행하였음
1761년(영조 37) 「다솔사명부전대양루사왕문중건기」를 지음
1777년(정조 1) 일휘, 민탄(敏坦) 스님 등이 팔상전(八相殿)을 중수함
1779년(정조 3) 경암 일호(鏡岩一晧) 스님이 「팔상전중수기」를 지음
1914년 화재로 사찰이 전소됨
1915년 사찰을 중수함
1917년 효당 최범술 스님이 이 곳에서 출가함
1928년 일본 유학 중이던 효당 최범술 스님이 주지로 임명됨
1930년 만해 한용운 스님이 응진전을 중수함
1934년 효당 최범술 스님이 이 곳에 광명학원을 세워 농촌 자제들에 대한 교육을 시행함. 이 무렵 김동리(金東里)가 이 곳에 머물면서 교사생활을 하였는데, 이 때 소설 「등신불」을 지은 것으로 알려짐
1939년 만해 스님의 회갑연이 이 곳에서 열림. 만해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경내에 식수를 함
1958년 효당을 중심으로 한용운전집간행위원회(조지훈, 임종국, 박노준, 인권환 등)가 구성되어 이 곳에서 간행작업을 진행하였으나 출판까지는 이르지 못함
1960년 대양루를 중수함
1972년 보안암석굴이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 39호로 지정됨
1974년 대양루가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 83호로 지정됨
1978년 대웅전 삼존불상의 개금불사를 하는 과정에서 후불탱화 속에서 108과의 사리가 발견됨
1985년 극락전과 응진전이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148호와 제149호로 각각 지정됨

 

 

 

 

 

 

 

 

 

 

 

 

 

 

 

 

 

 

 

 

 

 

 

 

 

 

 

 

 

 

 

 

 

 

 

 

 

 

 

 

 

 

 

 

 

 

 

 

 

 

 

 

 

※ 글 자료 : 전통사찰종합정보 및 다솔사홈페이지참조함

다솔사[多率寺],아름다운 솔숲과 편백나무길 있는

                                  봉명산 多率寺에서 茶香에 젖다

바다늑대Forever[2013.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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