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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순흥안씨(順興安氏)가 훌륭한 가문인 이유!

바다늑대FORCE 2013. 3. 1. 10:42

순흥안씨(順興安氏)가 훌륭한 가문인 이유!

우리나라에는 2000년도 기준으로 총 727개의 성씨(姓氏)가 있다고 한다.

이중에는 토착성씨(土着姓氏)가 285개이고 귀화하면서 새로 만들어진 외국인의 성(姓)이 토착 한국인 성씨보다 1.5배 많은 442개이다.

한국인 5명 가운데 1명은 김(金)씨이고 이(李) 박(朴) 최(崔)씨 등 상위 10대 성(姓)이 차지하는 비중이 전체의 절반이 넘는 64.1%나 된다.

우리 안씨는 17번째인 638.000명으로 그중 순흥안씨가 468,827명이며 이중에서 괴산군 감물면 175명,

경남 합천군 청덕면 168명이 집단으로 살고 있다고 한다.

순흥안씨는 고려(高麗) 신종(神宗)때에 흥위위보승별장(興威衛保勝別將)을 지내시고 신호위상호군(神虎衛上護軍)으로 추봉 받으신

안자미(安子美) 시조(始祖)께서 당시 흥녕(興寧-오늘의 경북 영주시 순흥면)에 거주(1170년-1180년)하게 된 후,

그 후손들이 그곳에 살게 되어 관향(貫鄕)으로 정함으로써 본관(本貫)이 순흥(順興)으로 된 것이다.

따라서 순흥안씨는 80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우리 순흥안씨는 1546년 처음으로 족보(族譜)를 문희공(文僖公) 안현(安玹) 선조께서 만들었는데 그 서문(序文)에서

[.....다만 한(恨)스러운 것은 시조(始祖) 이전의 가첩(家牒)이 전해 내려온 것이 없어서 기록을 다 하지 못하니 이런 점이 오늘날 한없이 슬프다.

그러나 지금 수보(修譜)하지 않으면 장차 어찌 할 것인가.....]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아무튼 역사는 기록과 유물에 의하여 논(論) 하는 것인데 시조 이전에도 선조가 계셨을 터인데 이를 알 수가 없어 안타깝다.

안자미 시조께서는 삼형제(영유 永儒, 영린 永麟, 영화 永和)를 두셨는데 그 자손들이 800여년의 긴 세월동안 조상을 잘 섬기고

친족끼리 화목하게 살면서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많은 업적을 남겼고 오늘날에도 각계 각층에서 많은 활약을 하고 있다.

우리 순흥안씨가 이조시대(李朝時代)에서는 6대성(六大姓 - 이.김.최.안.정.박)으로 불리어 왔는데 이는 수(數)가 많아서가 아니라

안향(安向-문성공 文成公), 안문개(安文凱-문의공 文懿公), 안축(安軸-문정공 文貞公), 안보(安輔-문경공 文敬公) 선조와 같은

훌륭하신 선조님들이 계셨기 때문이다.

우리 순흥안씨 가문은 유가(儒家)의 종가(宗家)로써 학자와 선비의 가문으로서 충효절의와 애국과 애민정신에 투철한 청렴한 가문으로서

민족개화(民族開化)와 독립운동에 앞장선 숭조목족(崇祖睦族)하는 모범된 가문이라고 할 수 있다.


1. 유가(儒家)의 종가(宗家)

순흥안씨 4세인 안향 선조께서는 1243년 순흥에서 태어나서 1260년 고려 문과(文科)에 급제하시고 상주판관(尙州判官-郡守)를 거쳐

좌승지(左承旨) 삼사좌사(三司左事) 집현전 태학사(集賢殿太學士) 계림부윤(鷄林府尹) 첨의시량찬성사(僉議侍郎贊成事) 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를

지내신 분인데 유학제거사(儒學堤擧司)로 있을 때 왕과 공주를 호종하여 원(元)나라에 가셨을때 주자전서(朱子全書)를 손수 베껴가지고 오심으로써

주자학(朱子學)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도입 하셨고 뿐만 아니라 학교를 설립하고 장학제도(獎學制度)를 마련하는 등 유학의 중흥을 도모하여

백성을 교화(敎化)하는데 심혈을 기우리심으로써 도학지조(道學之祖)라 불리우게 되었다.

따라서 안향 선조께서는 동방성현(東方聖賢) 18인중의 한분으로 문묘(文廟)에 배향(配享) 되셨고 지금의 모든 향교에 모셔져 있으며

공자 및 주자와 안자(安文成公)을 일컬어 삼성(三聖)이라고 하여 현인(賢人)으로 칭송하고 있으며 전국 각지의 많은 사당(祠堂)에서도 배향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때 안향선조에 대하여 평한 내용을 보면 중국 곡부의 공자 후손 직할 관청인 공부(孔府)에서 공식적으로 안자(安子)로 의결해 높였으며

이는 중국의 성현(聖賢)들인 공자, 주자와 같이 자자(子字)가 붙여졌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오직 안향선조만이 자자(子字)가붙여진 유일한 인물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또한 공자 종손이 직접 안자사당에 안자묘(安子廟)라고 쓴 현판을 보냈으며 또 일제 강점기 때 조선총독부에서는 총독이 직접 안자묘 사당에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이는 조선 통치 수단의 한 방법이었겠으나, 그 대표적 인물로 안향을 선정해 황해도 종가까지 방문했던 것으로 현재 종손의 선친이 갓을 쓰고 안자묘를 참배한

사이토 총독 일행과 기념촬영을 한 사진도 남아 있다.


또한 퇴계 이황은 소수서원에 제사하면서, ‘안향 선생은 그 공이 학교에 있어 길이 유종(儒宗)이 되었다’고 기렸으며,

나라에 청원하여 왕(王)의 친필 액자를 받음으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었다.

청음 김상헌은 ‘우리 유도(儒道)에 길이 공을 끼쳤다’고 했고, 택당 이식은 ‘해동유종(海東儒宗)’이라고 하였으며,

도암 이재는 ‘동방이학지조(東方理學之祖)’라고 추앙해 마지않았다.

그리고 역대 국왕은 사당에 제사를 지냈는데, 태종(太宗)은 안향이 학문을 일으키고 학교를 설립한 것은 백대(百代)의 왕이 본받을 만한 것이라 했고,

영조는 사제문(賜祭文)에서 ‘백세종사(百世宗師)요 해동부자(海東夫子)’라고 했고 고종(高宗)은 학문과 도덕이 백세의 유종(儒宗)이라 하였다.

이들은 모두 우리의 선조 안향을 유학의 조종(祖宗)이며 후진양성에 지대한 공을 끼친 인물로 인정하는 데에 이견이 없었던 사실이다.


조선조(朝鮮朝)가 개국되자 안향선조가 들여 온 성리학을 국가이념(國家理念)으로 삼았으므로 이로 인하여 이학지조(理學之祖)이며

문묘(文廟)에 배향되신 안향선생의 안문(安門)을 윗 자리에 올려 놓았다.


이조 태종(太宗)이 성균관(成均館)에 가서 석전례(釋奠禮)를 행하고 말씀하시기를 “---안향의 후손들을 대대로 등용하고 비록 서자라 할지라도

천역(賤役)에 속하게 하지 말고 세금과 부역을 면제하라(교왈안향흥학설교백왕가범보공지전당급묘예기자손수얼영물속천역적손즉세세견복록용동서반

(敎曰安珦興學設敎百王可範報功之典當及苗裔其子孫雖孼永勿屬賤役嫡孫則世世復錄用東西班)”고 하였으며

여러 임금들의 어록(語錄)에서도 이를 고증(考證)하고 있다.


이와같은 선조를 모신 우리 순흥안씨는 무릇 유가(儒家)의 종가(宗家) 입장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인(仁)을 근본으로 하는 정치 도덕의 실천을 주장한 공자로부터 주자에 이르는 유학의 정통을 동방에 있게 한 가문이라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고려조(高麗朝)가 불교를 정치이념으로 삼았다면 이조(李朝)는 유교(儒敎)를 정치이념으로 삼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조가 유교를 정치의 이념으로 삼게 된 것은 안향(安向)선조를 비롯한 선조들이 유학을 크게 진흥시킨 데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가 있다.

따라서 우리 후손들은 유가의 종가 자손답게 일상생활에서는 인륜(人倫)과 도덕(道德)을 생각하면서 부모에게는 효도하고 나라에는 충성하며

예의바른 생활로 가정을 다스리고 믿음으로서 친구를 사귀며 참되게 살아야 할 것이다.



2. 학자(학자)와 선비의 가문

예로부터 세분의 왕비(王妃)가 나온 가문은 한분의 정승(政丞)이 나온 가문만 못하고 세분의 정승이 나온 가문은

한분의 선생(先生)이 나온 가문만 못하다 라는 말이 전해왔다.


우리 순흥안씨야 말로 안향선조이래 계속하여 대를 이어 문자(文字)시호를 받은 선조들이 줄을 이어

모두 심오한 학문과 높은 도덕으로 우리 가문을 6대성의 하나로 올려놓은 것이다.


또한 10대(代)이상을 계속해서한대(代)도 거르지 않고 당상관(堂上官)이상의 벼슬을 하는가 하면 3대를 내려 부원군(府院君),

그리고 5대를 내려 대제학을 함으로써 삼수훈봉(三受勳封) 오전문형(五典文衡)의 보기 드문 명문가(名文家)로

고려조와 이조조를 통하여 유가의 대표적인 가문이 되었다.



특히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선조의 학풍을 이은 선조는 문정공(文貞公) 안축(安軸), 문경공(文敬公) 안보(安輔)선조이며

특히 안축선조는 관동별곡(關東別曲)과 죽계별곡(竹溪別曲)을 남겨 우리나라 국문학 사상 경기체가(景幾體歌)의 대가로

보배적인 글을 남긴 아름다운 시상(詩想)의 시인이기도 하다.

안지(安止)선조는 대제학으로 그 유명한 용비어천가를 짓는데 참여 하셨고 안방준(安邦俊-文康公)선조는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고

오직 후진의 교육에 전념하셨고 함안의 안관(安灌-聚友亭)선조도 교육에 전념하여 많은 학자와 선비를 배출하였고

안종원(安宗源-7세 文簡公)선조께서 남겨주신 가훈(家訓) 10조를 우리 가문에게 전해 주셨다.

우리는 학자의 가문에서 태어났기에 스스로가 배워야하고 자손들을 가르키는데 힘을 기우려야 할 것이다.

유가(儒家)의 유자(儒字)는 선비유자이다. 유가의 종가집에서 태어난 우리는 당연히 선비가문에서 태어난 셈이다.

우리나라에서 선비의 기풍이 확립된 것은 안향선조께서 성리학(性理學-주자학)을 들여온 후에 유학(儒學)이 진흥되고 많은 학자가 배출되면서부터였다고 한다.

안향선조의 교육사상은 흥학양현(興學養賢)의 교육이념과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정신으로 요약된다.

교육목표의 특징은 신념을 체계화한 일용윤리(日用倫理)에 있었으며 충(忠), 효(孝), 예(禮), 신(信), 성(誠)의 기본 실천 윤리가 생활덕목이었다.


그리고 주자는 선지후행(先知後行) 사상인데 반하여 안향선조는 지행합일(知行合一) 사상으로서

이(理). 기(氣)를 탐구하는 존양궁리(存養窮理)의 성리학의 유풍을 새롭게 진작시켜, 조선시대의 민족사상과 유교문화의 형성에 크게 기여하였던 것으로

조선유학사의 전개에 일대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또한 안향선조는 주자학의 이념속에서 민족생존의 이념을 확립하고, [재상의 직분은 인재교육보다 먼저 할 것이 없다.

(宰相之職 莫先於敎育人才)]의 교육정책과 그 사상은 후일에 조선 서원교육의 시발점으로 발전하였고

국가최고 사학기관인 소수의 교육정신으로 계승됨으로써 더욱 그 빛을 발하게 되었다.

백운동 서원이 소수사원으로 사액(賜額)이 되면서 관학보다 서원 중심의 사학이 발전함으로써 조선의 성리학은 그 진리가 크게 고양되고

꽃을 피우게 하여 오히려 중국을 능가하는 학문에 이르렀다.


조선 중엽인 16세기에 이르러서는 서원 중심의 사학 융성으로 성리학의 사상 및 철학적 논리가 최고 절정을 이룩하였다.

안중근의사(安重根義士)의 유묵(遺墨)중에 견위수명견이사의(見危授命見利思義)라는 글이 있다.

즉 선비는 나라의 위급함을 당하면 목숨을 바치며 눈앞의 이(利)를 보면 의(義)를 먼저 생각하라 하는 것이다.

안의사가 옥중에서 일본인들의 끈질긴 유혹을 받았지만 조금도 굴하지 않고 시종일관 변함이 없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선비정신의 발로(發露)였다고 본다.


충북 괴산의 계담서원(桂潭書院)에 배향된 안명세(14세 安明世-한림공 翰林公) 선조는 사관(史官)으로 있으면서 왕에 대한 바른 기록을 썼는데

이를 반대파가 모함해서 문초를 받게 되었는데 모진 고문과 심문을 받으면서도 조금도 굽힘이 없었고

당시 31세의 안명세 사관은 사형장에 끌려 나가면서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의연하여 보는 이들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하였다는 것은

역시 불의에 항거하면서 몸을 욕되게 하지 않는 선비정신에 의한 것이라 본다.


또한 같은 계담서원에 배향된 안술(17세 安述-세마공 洗馬公)선조는 병자호란때 성균관장의(成均館長의)로 있으면서

죽음을 무릅쓰고 청(靑)과의 화친 반대의 상소를 올렸고 낙향후에는 후진교육에 전념했다.

낙향후 진사(進士)로 후진을 가르키고 있을 때 세자비(世子妃)의 간택이 있어 공(公)의 따님이 물망에 올랐다.

그때 시골의 진사밖에 안되는 내가 어찌 임금과 감히 사돈을 맺을 수 있겠는가?하고 따님에게 궁중에 가면 왼손으로 식사를 하라고

비밀히 일러 보냈고 따님은 그 뜻을 따랐다.

궁중에서는 모든 점이 세자비로 충분한데 다만 한가지 왼손잡이가 되어 할 수 없이 간택에서 제외 되었으니

우리 선조님들은 자기 분수를 바로 알고 행동했던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훌륭하신 선조님들을 모신 가문에서 태어났으니 어찌 자기 몸을 바르게 닦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자기 집안을 잘 다스리고 학자와 선비의 가문으로서 유가의 종가집 자손다운 처세를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안향선조는 많은 제자들을 길렀는데 문하에는 이름난 여섯 학자가 있어 육군자라고 해 후손들이 추앙해 마지않고 있다.

육군자는 국재 권보(菊齋 權溥), 역동 우탁(易東 禹卓), 동암 이진(東庵 李瑱), 이재 백이정(彛齋 白頤正), 매운당 이조년(梅雲堂 李兆年),

덕재 신천(德齋 辛蕆) 등을 일컫는데 고려 말의 대학자요 정치가였던 익재 이제현이 국재 권보의 사위며 백이정의 문인이었던 점을 고려한다면

안향의 학문적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안향선조를 비롯한 이들 육군자는 음성 도통사에 배향되고 있다.

음성 도통사는 공자(孔子), 주자(朱子)의 사상과 도학을 계승 발전시킨 안문성공(安 文成公)의 정신과 유학을 충실히 실천 수범한 수제자

권국재(權菊薺)선생으로 이어져 고려 3은(3은)인 목은(牧隱) 이색, 포은(圃隱) 정몽주, 야은(冶隱) 길재에 이어 퇴계(退溪) 율곡과 같은

대유학자(大儒學者)를 배출하였고 우리나라 유학을 발전시킨 큰 줄기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공자, 주자, 안향선조등 성현을 주벽으로

안 문성공의 문인인 6군자에 노당 추적(露堂 秋適)과 근재 안축(謹齋 安軸), 경재 안보(敬齋 安輔) 두선조를 포함해서 함께 배향하고 있다.

도통사는 그 말뜻이 도학(道學)의 법통(法統) 즉 정통(正統)을 받들어 모신 사당(祠堂)으로 우리 순흥안문의 선조가 3명씩이나 한곳에

배향되었다는 것은 우리 가문이 얼마나 훌륭한 가문인지를 가늠할 수 있는 척도이다.

출처 : 119해병-바다늑대Forever
글쓴이 : 바다늑대[507]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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