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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윤이상의 반인륜 범죄에 이젠 속지 말자

바다늑대FORCE 2011. 8. 15. 09:41

윤이상의 반인륜 범죄에 이젠 속지 말자
북한 조종 문화공작원 윤이상
 
강규형 명지대 교수/ 소강절 시스템클럽 회원
윤이상의 범죄, 이젠 속이지 말자(강규형 명지대 교수/뉴데일리 게재)
 
필자는 어렸을 적 매해 하기휴가마다 가족들과 통영에서 보냈다. 그래서 통영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다. 통영은 낭만의 고장이고, 많은 훌륭한 예술가를 배출했다. 유치환, 유치진, 박경리, 김춘수, 김상옥… 작곡가 윤이상도 그중 한 사람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윤이상이 통영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추앙받고 있다. 원래 ‘윤이상 국제음악콩쿠르(Isang Yun Competition)’로 진행돼오다 이름이 바뀐 통영국제음악제(TIMF)는 윤이상을 기리기 위해 설립돼 몇 년간 성황리에 진행돼 왔다. (남한 좌익세력의 고의적인 문화선동으로 의심된다.) 윤이상의 작품은 대중과 유리된 현대음악으로서 매우 난해하다. 그의 오페라 심청은 초연 후 오랫동안 재공연이 안 됐다. 그러나 그는 뛰어난 현대음악 작곡가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윤이상기념관에 가면 그가 “애국자”였다고 써있으며,  통영국제음악제재단 홈페이지에는 “현대음악의 거장 작곡가 윤이상을 기리기 위해 시작된 통영국제음악제”의 취지가 “민족에 대한 사랑과 화합, 화해의 세계를 추구한 그의 음악세계는 현대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잘 반영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런가?
 
지금 통영에선 잔잔하지만 심상치 않은 파문이 일고 있다. 통영시 소재 경상대학교 해양과학대학 도서관 1층에서 ‘북한 정치범수용소 전시회’가 열렸다. 이 전시회는 통영기독교연합회와 통영현대교회에 의해 주관됐다. 거기에 있는 흑백 가족사진 한 장이 파문을 일으켰다.

이 사진은 1991년 작곡가 윤이상이 다시 월북하라고 회유하기 위해, 육성이 담긴 테이프와 함께 건네준 가족사진(사진 아래에 첨부)이다. 요덕(수용소) 출신 탈북자의 증언을 통해 이 사진의 배경이 수용소 내부라는 것이 확인됐다. 신숙자. 1942년 12월 10일 통영 서호동 출생. 통영초등학교 45회 졸업. 통영여중 9회 졸업.’ (사진 설명) “(오길남박사의 두 딸) 혜원·규원 자매와 아내 신숙자씨는 1987년 말 요덕수용소 혁명화구역에 갇히는데 이때 혜원 11세, 규원 9세였다.” (소개 팸플릿)
 
놀랍게도 윤이상 때문에 지옥과 같은 요덕수용소 생활을 하는 신숙자씨도 통영사람이었던 것이다. 윤이상은 '동백림(동베를린) 사건' 때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북한관련 실정법을 위반했던 것이다. 죄에 비해 형량이 가혹했고, 수사과정도 강압적이었다. 어찌 보면 그도 거칠었던 시대에 화상(火傷)을 입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숭고한 민족사랑"을 가진 위대한 "애국자"는 결코 아니었다.

 원래 예술가들은 자기도취에 빠지기 쉽고, 무책임한 행동을 할 때도 있다. 윤이상은 당시 북한체제에 대한 호감을 갖고 비밀리에 북한 측과 긴밀한 교류를 해왔다. 위법행위였지만 예술가의 낭만 탓에 당시로서는 그럴 수도 있다고 이해하고 싶다

 그런데 동백림 사건 이후 윤이상 부부는 북한을 자주 오가며 김일성과 주체사상 찬양의 노골적 나팔수역할을 했다. 김일성을 "우리 역사상 최대의 영도자인 주석님"이라고 쓴 편지는 압권이다. 더구나 독일 유학생으로 경제학 박사학위를 마친 오길남씨를 교수를 시켜주겠다며 가족과 함께 입북(入北)하도록 권유한 것은 심각한 경우였다.

독일에서 활약한 북한의 고정간첩인 김종한의 권유와 주선이 있었고, 독일에 있는 유명한 음악가인 윤이상으로부터 ‘박사 학위 취득을 축하하며 당신의 해박한 지식을 북에 가서 활용해 주기 바란다’는 서신을 받고 오길남은 입북을 결심했다. 부인은 적극 반대했지만 그는 입북을 결행했다. 그러나 오씨는 약속과 달리 북한에 가서 대남 공작원으로 이용됐고, 북한체제의 실상을 알고 나선 탈출했다. 윤이상은 오씨의 북한 복귀를 강요하며 안 돌아갈 경우 "은혜를 베풀어준 주석을 배반"했기에 "가족을 가만두지 않겠다" "가족은 죽는 줄 아시오"라는 무시무시한 협박을 했다 한다.

오박사는 탈북 후 5년 동안 독일에 거주하면서 북한의 '대남 공작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윤이상을 만나 그의 가족을 송환시켜 줄 것을 수차에 걸쳐 간절히 요청했다. 그러나 윤씨와 부인 이수자는 신씨 모녀 사진과 음성이 녹음된 카세트테이프를 북한에서 가져와 오씨에게 두 차례 전하며 재입북을 강요했다

 그러면서 윤이상은 이렇게 말했다 한다. “당신은 미제 고용 간첩이다. 은혜를 베풀어 준 김일성 주석을 배반했으므로 가족을 인질로 잡아 둘 수밖에 없다.” 그리고는 다시 입북해 김일성에게 충성을 다할 것을 강요했다. 오씨 가족은 현재 북한의 강제수용소에서 비참하게 살고 있다 한다. 사진전의 그 사진은 윤이상이 오박사를 협박하면서 건네 준 바로 그 사진이다. 상상만 해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장면이다

 이것이 작곡가 윤이상과 인간 윤이상을 분리 평가해야 하는 이유이며, 그가 절대로 애국자가 될 수 없는 근거이다. 역시 동백림 사건 연루자였던 이응로 화백 부부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대표적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당대의 은막(銀幕) 스타 윤정희 부부는 묘하게도 1972년 뮌헨에서 윤이상의 오페라 '심청' 초연(初演)을 보러 와서 처음 만나 사랑에 빠졌다. 결혼 주례는 고() 이응로였다

 그런데 1977년 여름 백건우 부부는 유고슬라비아의 자그레브에서 북한에 납치될 뻔했다. (나중에 유령인물로 밝혀진) 한 스위스 부호가 백씨의 스폰서가 되고 싶으니 만나자는 거짓말로 이들을 유인한 사람은 놀랍게도 이응로의 후처(後妻) 박인경이라 한다.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한 백·윤 부부는 미국 영사관에 몸을 의탁해 극적으로 생환했다. 백씨 부부가 북한에 납치돼 당했을 일들을 생각하면 오싹해진다.

몇 년 전 유고 공산당 문서가 비밀해제되면서, 이 사건 당시 유고 주재 북한 대사가 북한이 치밀하게 계획한 소행임을 인정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명백한 증거가 나온 것이다. 또한 여러 정황을 보면 이 화백은 아닐지라도, 그의 처는 납치 기도에 직접적으로 연루됐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다. 이응로씨 부부는 사건 조사를 거부하고 잠적했으며, 결국 한국 국적을 버렸다

 그런데 그녀(박인경)가 어느 순간부터 한국을 자유로이 드나들며, 김대중 정부 시절엔 청와대에도 초청되는 귀빈 대접을 받았다. 백건우 부부는 이에 놀라 납치 미수사건의 조사를 정식으로 요청했으나, 국가정보원은 철저히 수사하지 않고 어물쩍 넘어가 버렸다. 당시 국정원장은 "내 임기가 끝나 제대로 수사를 못했다"라는 어이없는 변명만 남겼다

자국민의 납치사건도 제대로 수사 안하고, 이 사건에서 결백할 수 없는 사람을 오히려 귀빈 대접한 나라가 제대로 된 나라인가. 하루빨리 재조사가 이뤄져야 하며, 누가 조사를 방해했는지, 그리고 진상은 무엇이었는지 밝혀야 한다. 어차피 공소(公訴) 시효는 지났다. 진실을 역사에 남기자는 것이다. '죄지은 사람'이 있다면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한 한국사 교과서는 윤이상과 이응로 등이 연루된 ‘동백림(東伯林·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부정선거에 대한 비판여론이 고조되자, 중앙정보부는 동백림 간첩단 사건을 발표하였다. 유럽에서 평화 통일 운동을 하던 작곡가 윤이상, 화가 이응로 등을 간첩으로 체포하여 국내로 압송하였던 것이다.”

 가공(可恐)할 왜곡이다. 마치 부정선거를 감추기 위해 동백림사건을 조작한 듯한 뉘앙스를 풍기고 있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윤이상과 이응로는 북한관련 불법을 저질렀기 때문에 유죄판결을 받은 것이지, '평화 통일 운동'을 했기에 구속됐던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 이후 윤이상의 행동은 도를 벗어난 김일성체제 찬양 활동이었다.

다시 통영 얘기로 돌아가자면, 통영 현대교회 담임목사 방수열씨와 그의 부인 소신향씨가 이 전시회를 주관하고 있다. 신숙자 모녀 생사 확인요청 및 구출 탄원서 서명운동도 벌이고 있다. 많은 이들이 도와야 할 일이다. (서명에 참여하고 싶은 분들은 soosin153@hanmail.net 로 연락)

통영에서 이런 전시와 운동을 하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없으면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방목사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평범한 목회자로 그저 하나님께서 말씀하셔서 집사람과 이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혜원·규원자매 구명운동’은 이지혜(29·국제변호사, 부산 예양교회)씨 같은 사람들도 주도하고 있다.

 윤이상의 명예가 훼손되면 통영의 관광수입이 줄어들 것으로 걱정한다는 분위기도 있다니 이 얼마나 저열한 생각인가. 통영국제음악제가 열리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다. 그를 훌륭한 작곡가로 칭송하는 것도 좋다. 필자는 음악을 무척 사랑하는 애호가이다. 아까운 국고로 지은 윤이상 기념공원도 그대로 둬도 좋다

 하지만 예술과 인간의 행적은 분리하자. 더 이상 진실을 부정하고 허위에 기대지 말자. 윤이상의 반인륜적인 행위를 알고서도 역사를 왜곡하며 그를 애국적 위인 취급하는 것은 이제 끝내야 한다. 그래야만 통영의 명예도 살고 통영국제음악제도 산다. [강규형 명지대 기록대학원 교수: 
 http://www.newdaily.co.kr/]
 
▲ 요덕수용소에 수감 중인 오길남 박사의 가족 아내 신숙자, 큰딸 혜원, 작은딸 규원의 모습. 1991년 1월 20일 작곡가 윤이상씨가 오씨에게“다시 월북하라”고 종용하며 오씨 가족의 육성이 담긴 카세트테이프와 함께 이 사진을 건넸다. 요덕 출신 탈북자의 증언을 통해 이 사진의 배경이 수용소 내부라는 것이 확인됐다

북한의 조종을 받아 활동했던 북한 문화공작원 "윤이상"(소강정 시스템클럽 회원)
 
윤이상의 실체는 1992년 "오길남 간첩 사건"으로 다시 확인됐다. 오길남 박사는 독일 유학 중 정치 망명한 뒤1985년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입북해 한민전 대남흑색방송요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1986년 11월 '재독 유학생 포섭 대동(帶同)입북 지령"을 받고 덴마크로 침투하던 중 코펜하겐 공항에서 홀로 탈출에 성공했다. 이후 오박사는 독일 등지를 떠돌며 가족의 구명을 위해 애를 쓰다 1992년 5월 결국 한국으로 돌아왔다.

윤이상은 북한과 연계해 오박사의 입북을 적극 권유 및 주선했고 오박사가 탈출 후 독일에 체류하는 과정에서도 갖은 협박을 하며 재입북을 권유했다. 윤이상이 독일에서 설립한 한국학술연구원(KOFO)역시 북한 대남공작기구의 자금을 받아 설립, 운영된 조직이라는 사실도 밝혀졌다.

정부는 1992년 국가안전기획부가 발간한 '입북자수간첩 오길남 사건내용'이라는 수사 결과에서 윤이상은 북한의 정치노선에 따라 활동하고 있는 북한의 문화공작원이라고 판단했다. 또 17회에 걸쳐 입북하여 김일성을 접촉하고, 김일성75회 생일 선물로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라는 노래를 선물했던 사실도 적고 있다. 일부를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윤이상은 80.11 북한 조국통일 민주주의 전선 중앙정보위로부터 '고려연방제창립준비위원회 결성을 위해 해외대표로 참석하라'는 서신을 받는 등 북한 의 정치노선에 따라 활동하고 있고, 84.12 평양에 북한의 해외문화 공작전위 조직인 '윤이상 음악연구소'를 설립하였고, 88.7 동경에서 정부의 대북교류 및 개방화 추세에 편승, 휴전선에서 '남북 합동음악제' 개최를 제의, 북한 측으로부터 즉각적 찬동을 얻는 등 북한의 문화공작에 따라 남북음악제를 추진한 바 있고, 한편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17회에 걸쳐 음악제 구실 등으로 입북, 김일성을 접촉하는 한편, 김일성75회 생일선물로 작곡하여 바친 반미, 반파쇼, 통일투쟁을 내용으로 한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등 자작곡으로 10회에 걸쳐 연주회를개최하는 등 윤이상은 북한의 조종을 받아 활동하고 있는 북한의 문화공작원임.

1992년이면 민주화된 세상이다. 당시 국가기관은 '윤이상은 북한의 조종을 받아 활동하고 있는 북한의 문화공작원'이라고 판단했다. 수시로 입북해 김일성을 만났고, 김일성75회 생일선물용 음악까지 작곡해 바쳤다. 모두 확인된 사실이다. 좌파 정권 종식 이후에도 윤이상을 기리는 1480억짜리 음악당이 추진됐다는 것은 희극적인 비극이다. 건국 대통령 이승만, 근대화 기수 박정희를 기리는 기념관도 짓지 못하는 처지에 수천 억짜리 반역자 음악당 건립이라니?

윤이상의 친북 행적은 오길남 박사가 1993년 서울에서 출간한 <<김일성 주석 내 아내와 딸을 돌려주오>>라는 책에 자세히 적혀 있다. 수기 형태로 집필된 이 책은 윤이상의 북한 정권에 대한 충성과 헌신의 강도를 느끼게 해준다. 오박사는 1985년 자신의 입북 과정에 대해 기술하며 윤이상을 '북과 내통한 거물'로 적었다. 또 윤이상이 민족통일운동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때라며 적극적으로 입북을 권유했다고 나온다.

소위 북한에 가서 하게 될 민족통일운동은 북한의 한민전 산하 대남 흑색방송인 구국의 소리를 전담하는 칠보산연락소 활동으로서 노골적인 적화 통일선동이었다. 윤이상은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세계적인 음악가가 아니다. 적화통일 활동을 부추기며 오박사를 북한으로 내몰았던 인물이다. 국가 파괴자였다. 역사상 어떤 나라가 자신을 파괴하려던 자를 기리는 음악당을 건립하고, 음악제를 개최할까? 그렇게 하고도 존립할 수 있는 국가는 과연 존재하는가?

'윤이상 씨가 내게 편지를' 나(오길남)는 놀람 반 불안 반으로 편지를 받았다. 왜냐하면 윤이상이 북과 내통한다는 걸 독일에 사는 우리들은 모두 알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는 거물이었다. (...)'간난신고 끝에 학위를 취득한 것을 축하합니다.(...) 이제는 민족통일운동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때라고 생각하오. 그러니 북한으로 가서 그동안 배운 지식을 동포를 위해 썼으면 하오(...)윤이상씨는 내게 거듭 권했다. '고생하지 말고 북한으로 가시오. 거기가면 오박사는 대접을 받으면서 학문을 이룰 수가 있소
(출처: <<김일성 주석 내 아내와 딸을 돌려 주오>>)

윤이상은 1986년 오박사가 북한을 탈출한 뒤 '은혜를 베풀어준 김일성 주석을 배반했을 뿐 아니라 칠보산연락소 비밀 소지자이므로 가족을 인질로 잡아둘 수 밖에 없다'며 다시 북한에 돌아갈 것을 회유했다. 윤이상은 북한에 동조하지 않는 오박사를 힐난하며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내 말을 듣지 않고 다시 경솔한 짓을 하면 당신 가족을 가만두지 않겠소. 왜 사람들을 집적거리고 다니며 북을 욕하는 거요. 가족을 잃어야 정신을 차리겠소? 통일운동에 나서라고 하지 않았소? 왜 좋은 글을 써서 신문이나 학술잡지에 내지 않소? 그렇게 하지도 않으면서 통일운동을 자꾸 훼방 놓고 다니면 당신 가족은 죽는 줄 아시오.
(출처: 상동)

윤이상은 오길남 박사에게 '통일운동에 나서라', '좋은 글을 써서 신문이나 학술잡지에 내라'고 강권했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도 않으면서 통일운동을 자꾸 훼방 놓고 다니면 당신 가족은 죽는 줄 알라'고 경고했다. 윤이상이 말하는 소위 '좋은 글을 써서 신문이나 학술잡지에 내고, 통일운동에 나선' 이들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조선로동당에 입당해 반국가활동을 벌인 재독학자 송두율도 대표적이다.

오박사는 김일성, 김정일 전위대 노릇을 하라는 윤이상의 협박을 듣지 않았다. 들을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노예가 아닌 이성을 가진 인간으로서 살고 싶었을 것이다. 결과는 참담했다. 오박사는 1992년 한국에 들어온 탈북자 강철환, 안혁 씨로부터 가족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가족이 모두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됐고 아내는 자살을 시도했다는 얘기였다. 1992년 11월 29일자 서울신문에는 오박사 가족의 이야기가 실렸다. 
'신 아주머니는 수용소의 첫날밤부터 목 놓아 울었다. 어린 딸들과 이곳에서 짐승같은 생활을 하다가 죽게 되다니(...)'기사는 이렇게 이어진다.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온종일 작업을 하느라 녹초가 된 사람들은 신 아주머니의 구슬픈 하소연과 울음소리에 신경 쓸 처지가 못 됐다.(...) 이튿날 새벽녘 간밤의 울음소리와 다른 여자 아이들의 날카로운 울부짖음에 놀라 눈을 떴다. 방문을 열어젖히자 이불보를 말아 만든 끈에 신 아주머니의 목이 매달려 있었다.(...) 그들은 지난 4일 독일 주재 우리 대사관을 통해 귀순한 박사 오길남씨 부인 신숙자씨와 두 딸 혜원, 규원이었다.(...) 그러나 이날의 자살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 후에도 그녀는 몇차례 더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신 아주머니가 수용소에 들어온 지 석 달째쯤이었다. 새벽녘에 '불이야'하는 소리에 깨어났다.(...)판자문을 열자 방안은 연기와 불길로 가득 차 있었고 신 아주머니가 두 딸을 겨드랑이에 꼭 낀 채 머리카락과 얼굴, 손발이 불에 그을려 실신해 있었다. 신 아주머니를 밖으로 끌어냈다. 그녀는 발버둥 치면서 울부짖었다. '죽는 것이 행복한데 왜 말리느냐!' 그날 이후 신 아주머니는 실성한 듯 웃으며 말하고는 했다. '여기는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는 곳이니 할 수 없이 살아가야지.(...)'

정치법 수용소는 흉악범이 들어가는 곳이 아니다. 김일성, 김정일 정치에 거스른 죄 없는 이들이 수감된다. 김일성은 '정치범은 씨를 말려버리라'고 교시했다. 실제 100만 명 넘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죽어나갔다. 지금도 20만명 넘는 사람이 갇혀 있다. 오박사의 가족도 그 중 하나다. 누가 그들을 그곳에 보냈는가? 윤이상, 그는 오히려 '통일운동을 방해하면 가족들이 죽는 줄 알라'고 협박했다. 사상(思想)과 이념(理念)이 인정(人情)과 인륜(人倫)도 뭉개버렸다. 무엇보다 그 사상, 이념은 대한민국을 파괴하자는, 해체하자는 것이었다.


+++[도서], 북마크 社/ 2009년 12월 25일 초판2쇄 발행... 
               좌파인물 15인의 사상과 활동 "억지와 위선" 中,
             윤이상 편/"김일성의 애국자" 윤이상을 기리는 대한민국 中,
            '북한의 조종을 받아 활동했던 북한 문화공작원 "윤이상" +++ http://systemclub.co.kr/

 
▲ 통영, 인평초등학교 병설 유치원생들이 신숙자씨 가족에 관해 설명듣고 있다 (사진: 주간조선)
 
잘 나갔을 때의 윤이상 부부

출처 : 119해병-바다늑대Forever
글쓴이 : 바다늑대[507]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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